잘 다녀오겠습니다

15년 쓰는 육아일기

by 강물처럼


50대 친구들이나 지인들에게서 아들, 딸이 성장해서 부부만 집에 남았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어색하거나 불편하거나 투명인간처럼 지내지 않고 즐거운 방법은 없겠느냐며 묻는다. 먼저 얼마나 궁리했을까 싶을 만큼 진지한 물음이다.

나라고 알겠는가.

나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돌아오는 길에 묻는다.

어떻게 어색하지 않을 수 있느냐고, 바람도 싫을 때가 있고 음악도 귀찮은 적이 많은데 어떻게 사람이 항상 좋겠냐고.

아이들 밥그릇에 밥알이 보기 싫게 붙어있고 밥 먹은 자리가 어지러우면 그대로 놓고 집을 나가고 싶어 진다. 그냥 나가고 싶은 것이 아니라 사라지고 싶어 진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만 헤어지고 싶어 진다. 이별이 그렇게 순간이었으면 한다. 다른 말, 후회한다는 말이라든지 미안하다는 말, 회한 같은 감정이 나를 휘감기 전에 나는 훌훌 벗어나고 싶다. 미워하지 않고 미안하지 않는 마음으로 돌아가는 문을 연다. 그리고 설거지를 한다.

설거지는 세상을 떠나는 인사다. 그 마음을 담는다. 씻고 헹구고 때로는 뜨겁게 삶기도 한다. 수저도 젓가락도 그릇도 하나씩 그러다가 접시를 꺼내오고 집게라든지 칼, 국자까지 다 삶아낸다. 식초를 넣었던가 따져보는 일이 작별에는 어울린다. 나는 작별한다. 너희에게 말끔한 것을 마련해 놓고 어제, 그리고 그 전을 살았던 나는 벌써 사라지고 없다. 가을비처럼 직선들을 찰랑거려 놓는다. 그것들이 시나 그림이라도 좋을 만큼 적셔 놓고 감상을 자아낸다. 내가 만든 세상을 관상 觀賞하며 맛을 음미한다. 가을이며 너희들이고 일상이면서 계절이다. 나를 놓아주는 바람과 나를 날려 보내는 바람 사이에서 풍선껌 향이 난다. 좋은 날, 너희는 학교에 가고 없다.

8시에서 8시 19분까지는 세상에 지배자가 따로 없다. 학교, 학교 가방, 학교 준비물, 학교 친구, 학교 등교 시간, 학교다. 모든 것이 그 하나로 바쁘고 왁자지껄하며 나도 너희를 돕는다. 내가 다닐 학교는 늦게 문을 열어서 고맙다. 8시 20분, 현관문이 열리면서 '다녀오겠습니다.'로 너희는 문을 닫고 문을 연다. 너희가 닫은 문 뒤로 나는 기쁘게 서서 망부석처럼 멀리멀리 굳어져 간다. 자유로운 것이 나에게 와서 잠시 동안 둥지를 트는 그때를 음악이라고 할까, 커피라고 할까, 기타라고 할까? 마룻바닥이 좋겠다. 오늘따라 무늬가 정겨운 바닥을 쓰다듬는다. 사랑한다는 느낌이 솟는다.

그래, 고마운 마음이다.

잘 다녀오겠다는 말은 정말이지 고마운 마음이다.

어려서부터 키웠던 그 마음을 언제나 잊지 말고 물을 줘가며 볕에 내놓고 키워야 한다. 생명 있는 것들은 어느 순간 빛을 잃고 시름시름 앓기도 하니까 부디 어미새가 새끼를 품듯 너희는 너희의 그 마음을 보살펴라.

먹고 마시며 즐겁더라도 살피고 흐르는 물에 말끔히 씻어놓아라.

그래서 늘 어디서든 잘 다녀올 수 있어야 한다. 숨 쉬는 일이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라는 지혜를 너희가 맺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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