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하나가 스치며 묻습니다.
´그 자리는 네 자리냐? ´
그것은 옳고 그른 것을 따져 묻자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어떤 것보다 힘 있는 질문이 될 것입니다.
자기 자리를 찾아 제대로 머물고 있으며, 되기로 한 그것이 되었는가는 누구에게나 의미심장한 물음입니다.
묻지 않고 따지지 않고 묻히는 많은 다른 물음들 위에 오롯이 놓여 있는 그 말을 언젠가 한 번은 꼭 만져볼 때가 있을 겁니다.
그때가 너무 이르거나 늦지 않기를 또한 바랍니다.
하늘이 돕는다는 것은 잘 익은 밥을 그릇에 담으면서 배고픔을 느끼는 일입니다. 마침이란 그 기막힌 순간에 찾아와 나를 돕는 것들은 모두 보석이 됩니다. 마침 잘 왔다 싶은 것만큼 반갑고 즐거운 마음은 없습니다.
생로병사를 자본의 원리에 비춰 해석하고 설명하는 일이 점점 많아지더니 그 힘이 넓어지고 깊어지는 시대입니다.
많고 적음이 언젠가부터 좋고 나쁜 이분법적 테두리 안에 갇혀 더 이상 기운을 차리지 못하는 형세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부족한 것은 위험해졌습니다. 부족함 그 자체가 위험한 것이 아니라 나쁘게 인식되는 설정이 위험수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마음이든 머리든 부족한 것은 거부하기 시작했으며 그것은 열등한 것이 되었습니다. 마치 자연도태처럼 능력 없으면 사라지라고 한쪽 문을 열어놓고 재촉하는 듯한 분위기는 저 혼자만 느끼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아프고 나서 아픈 사람들 편에 서는 일은 자연스럽습니다.
변호라는 것은 그런 거라는 생각입니다. 내 발은 따로 빼놓고 그 사람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 같은 땅을 밟고 같은 높이로 서서 말할 줄 알아야 변호 이전에 최소한의 설명이라도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그것은 요원하기만 한 일입니다. 맞는 말이지만 그리고 바람직하지만 현실성이 없습니다. 현실적이지 못한 것은 폐기 처리됩니다. 사랑이든 믿음이든 무엇이든.
그래서 자본의 원리라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루카 9:44
61세의 현직 의사는 성묘 다녀오는 길에 도로에서 교통사고 현장을 목격합니다. 그는 다친 사람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마침´ 그는 의사였습니다. 도로 한쪽에 차를 대고 일부러 현장을 찾습니다. 그다음은 많이 아실 것입니다. 다행히 부상이 심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자기 차로 돌아오는 길에 다른 차에 사고가 나고 맙니다. 빗길에 마주 오던 차가 미끄러지며 그는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자본은 이것을 어떻게 바라볼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릇이란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우리는 어느 자리, 어느 때에든 그릇이 되며 동시에 그릇 안에 담기는 물이 되기도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릇이 되느냐 물이 되느냐는 선과 악의 선택이 아닙니다. 자연스러운 흐름이며 과정이라고 여깁니다. 이 사람을 만나면 내가 그릇이 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만나면 그때 선연 鮮姸히 물이 되기도 합니다. 과장이나 억지가 없이 내 자리가 저절로 생겨나고 그 자리가 편하고 즐겁습니다. 그것은 직책이나 신분하고는 다릅니다. 그 의사 선생님은 불행하게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먼 훗날 다시 생각하게 되면 자기 자리를 그처럼 잘 지켰던 사람들도 드물다는 생각에 이를 것입니다. 숭고함이라든지 아름다움이란 말은 그와 같은 순간에 어울립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도 반갑습니다. 하지만 저는 자기 자리, 제자리를 알아보는 일은 하늘이 도와야 한다고 믿습니다.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있으면 오감이 다 행복하다고 아우성일 것입니다. 사시사철 꿈인 듯 살아갈 것입니다.
사명 使命과 치명 致命이란 말도 무겁지 않을 것입니다.
뒤에 남은 사람들, 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한편 부럽고 한편 무거운 그런 말들입니다.
삼가 고인의 평온한 안식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