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 못 박히는 예수님의 마지막만큼 예수님 탄생 그리고 탄생을 예비하는 장면 또한 사람의 예상을 뛰어넘습니다.
탄생의 신비에 환호하고 죽음의 슬픔에 빠지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 마태오 1:18
신비로운 일이지만 기뻐하고 환호하는 문장이 아닙니다. 다만 고요히 사실을 적시하고 있습니다. 순응하고 받아들일 뿐입니다.
어쩌면 삶이 우리들 각자에게 주어졌을 때도 이와 같은 정적이 흘렀을지 모릅니다.
세상에 나가는 일이 축하받을 일이었을까 기억을 더듬어 봅니다. 그때 나를 지켜봤던 존재들은 나를 부러워했을지, 아니면 묵묵히 잘 다녀오라며 배웅했을지 금방 알 것만 같습니다. 세상에 온 것을 서로 환영해 주는 우리는 동병상련입니다. 그래서 의지하며 살라고 사람 人이 되었던가 봅니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할머니는 한숨과 한숨 사이에 버릇처럼 ´예수, 마리아´ 그러셨습니다.
어렸던 저는 그게 한 단어인 줄만 알았습니다. ´예수마리아´
머리가 커지면서 그것은 예수님하고 성모 마리아, 그 두 분을 부르는 것이라고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생략된 말들이 바로 기도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가끔 한숨을 길게 탄식처럼 놓으실 때는 ´우리를 위해 빌으소서´ 그러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 것 듣기 좋아했습니다.
모르는 사이에 뜻이 전달되는 말들, 하지만 결코 그 뜻을 다 헤아리지는 못하는 하늘이나 바다 같은 말들을 가끔 마주칠 때는 손을 모으고 나도 빌어주고 싶었습니다.
´나무 관세음보살´
그런 것은 별로 소용없었습니다. 절하면 안 돼, 우상이야, 잘못 알고 있는 거야.
하나를 다 알아가는 일도 벅차고 부족하기만 해서 언제 이것을 끝낼 수 있을지 엄두도 나지 않았습니다. 옳고 그른 것을 따지기 전에 나는 나 하나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실에 늘 감명을 받습니다. 종교, 잘 모릅니다.
그래서 할머니가 하는 대로, 어머니가 가라는 대로 그렇게 다녔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그런 분들이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따라서 다니기만 하면 평화로워지는 사람들이 점점 더 그리워집니다.
평화를 건네는 것이 종교적이며 그것이 인간이 되는 부분, the part of Being human 아닌가 싶습니다.
진리는 자유롭고 그 자유는 평화가 됩니다.
불완전한 나를 지긋이 지켜보며 잘 다녀오기를 염원하는 마음이 진리입니다.
우리는 잘 다녀오겠다며 세상에 나가고 잘 다녀왔다며 인사해야 합니다. 우리를 기다리는 부모가 진리입니다.
´괴물´이란 영화에서 변희봉 씨가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 늬들 그 냄새 맡아본 적 있어?
새끼 잃은 부모 속 타는 냄새 말여.
부모 속 썩는 냄새는 10리 밖까지 진동을 혀."
진리가 우리를 걱정합니다. 진리는 늘 그 자리에 있습니다. 아낌없이 주고도 떠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도 우리 다음에게도 그다음, 다음 사람들을 벌써부터 보듬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평화롭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는 뜻이다. > 마태오 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