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고 있다. 빗소리가 제법 시끄러운데 다행히 자고 있는 사람을 깨우지 않는다. 혹시 모르지, 설핏 잠에서 깨어 이 빗소리를 푹 끌어안고서는 오늘이 추석이라는 어렴풋한 생각에 기분이 더 좋을지도. 산이는 그렇다면 두 배로 좋겠구나. 오늘 생일이니까.
비가 온다는 소식은 미리 듣고 있었다. 어제도 구름이 슬슬 몰려들기 시작했었잖아.
내일까지 비가 올 거라는 예보가 아무래도 맞을 것 같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도 그렇고 하늘에서부터 비가 내리치는 기세를 방에서도 느낄 수 있을 정도다. 천둥과 번개가 몇 번인가 다녀가기도 했다.
우리가 어제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봤던 달은 보름달이었을까, 아니었을까. 오른쪽 위로 환하고 밝은 달이 한 번씩 눈에 들어오던데 너희는 달구경 잘했겠다. 어떻든, 그것은 은은했었냐.
은은한 것은 사물이 발하는 빛이기도 하지만 종소리처럼 깊이가 있고 맑은 것이 사람 마음에 천천히 들면서 내는 소리, 그 소리의 모양인 것을 너희는 알았을까. 그것은 또한 향기가 추는 춤 같아서 그윽한 것들과 은은한 것이 어울리는 곳에서는 사람 마음이 지극해진다. 꽃을 하나 보더라도 흐르는 시냇물에 발을 담그는 것도 하늘에 별이며 달을 감상하는 일에서도 마음이 정성을 다하는 것을 넌지시 알 것 같은 시절이 곧 올 것이다. 그런 달빛이더냐 묻고 싶은 것을 참고 나는 오늘 새벽에 생일 축하 편지를 쓴다. 비가 내리는 것도 개의치 않고 조용조용 적어보면서 네 아침을 준비하고 싶다.
미역국을 끓이겠다며 엄마는 소고기도 사다 놓고 명절 따로 생일 따로 준비가 바쁘구나.
그것은 자식에 대한 어미의 사랑 같은 것이구나. 마침 나는 어제부터 영국 작가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라는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내게는 조금 낯선 서술 방식이긴 한데 막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부분에 이르렀다. 모성애도 나오고 가정을 지키려는 노력과 몸부림, 책임과 의무 같은 우리네 흔한 가정들이 공유하는 '이상적인' 사연들이 '이상하게' 꼬여가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다른 사람의 복잡한 스토리는 구경하는 사람에게 선물 같은 것이어서 그것이 복잡해질수록 잃어버린 블록 하나를 찾아내어 빈칸을 맞추고 그림을 완성시키는 초조함이나 짜릿함 같은 자극이 명치끝에서 진동한다. 커피가 나왔다고 부르르 떨며 시끄럽게 구는 그것 말이다. 나는 그런 류의 감상을 대할 때 말초신경을 자극한다고 쓰는 대신 소변이 마려웠다고 하는 편이 더 사람을 간지럽힌다는 것을 안다. 소설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로 사람들을 위로하고 겁을 주고 격려하며 웃음과 서스펜스를 건넨다. 사람들에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이야기가 되면서 소설은 생명을 얻는다. 탄생은 실재의 다른 이름이다. 상상이 실재가 되고 존재가 되는 탄생의 순간은 우주의 빅뱅 같은 것 아닐까.
이렇게 비가 내리다니, 어제 우리가 멀리 서해바다에 떠있는 섬에 다녀온 것은 잘한 일이다. 나는 그 섬에 다섯 번을 다녀왔다. 그러고 보니 오늘 숫자는 5, 다섯이구나. 스물여덟 살 먹은 사람을 우연히라도 만나거나 발견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었다. 그때마다 나는 허탕을 쳤다. 어제 우리가 앉았던 모래사장에서 바라보이는 작은 섬 몇 개, 바다 위에 떠있는 그것들 말고 세월을 공으로 먹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고 모래알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잖냐, 내가 밟았던 그 모래알이 맞느냐고 묻는 것도, 설령 그래, 맞다고 손뼉을 치며 반갑다고 하더라도 거기에다 집을 짓고 살 수는 없는 일 아니겠냐. 그리움은 바다 같은 것이더라. 그 물은 흘러가서 비가 되고 다시 어느 골짜기, 어느 물고기가 숨을 쉬고 노는 물이 되었을지 모르는데 바다는 바다인 채로 밀려갔다 밀려오느라 내가 누군지도 무엇인지도 아무 관심이 없다. 차라리 비가 내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오늘 아침에 성당에 갈 일이나 챙기는 것이 삶에 더 가깝다. 상념은 바닷가에 부는 바람처럼 일상적이고 그 생채기가 가라앉을 날이 없지만 한 번도 배부르게 나를 맞아준 적도 없고 하룻밤 재워준 일도 없다. 먼 옛날은 구름으로 부풀고 때가 되면 울어서 물기를 빼고 가벼워져야 한다. 흩어져 바람으로 세상을 돌아다닐 줄 알아야 바위를 타고 산등성이를 넘지. 그렇게 이슬 같은 세월을 한 바퀴 돌고 나면 그때 또 그리운 것을 찾아 바다 앞에 앉아서 노래를 부르면 된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식으로 말이야.
바다 위로 다리가 놓여 차를 타고 섬에 들어갈 줄 그때는 몰랐다. 그때는 배를 타고 선착장에 도착했고 거기서부터 내내 걸었다. 걷기만 했었다. 네비도 휴대폰도 공중전화도 없이 바람만 부는 섬이었다. 구멍가게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가게에서 라면을 끓여줬었고 신작로를 벗어나면 먼지가 나는 비포장길이었다. 너는 비포장이란 말을 어떻게 이해할까.
오늘 산이 생일이다.
매일 축하해도 모자란 마음이다.
아빠가 말을 넉넉하게 건네지는 못하지만 고마운 것이 많다. 비록 세월이 무상 無常하더라도 너 때문에 내가 보낸 그 시간은 충분히 좋았던 것이라고 나는 고백한다. 너와 함께 보낸 15년이 금방이었다. 넓고 무한정한 것들은 나를 봐도 알아차리리 못하고 나는 그 속에 빠졌는지 갇혔는지도 모르면서 존재한다. 세월이 그렇고 바다가 그럴 것이다. 우리는 점보다 작은 점으로 연결되는 지금 이 순간을 백으로 반기자. 온통 반기기로 하자. 내 작은 점으로 네 작은 점을 환영한다. 그리고 영원 속으로 무수히 흘러가기로 하자.
HAPPY BIRTHDAY TO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