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161

아침에,

by 강물처럼


옆에 앉아 있던 아이가 그럽니다.


"선생님은 책을 밑줄 그어가며 보네요?"



웃으면서 답해줬습니다.



"응, 다시 읽을 시간이 없을 것 같거든."



저도 누구보다 책을 아끼는 부류였습니다. 책에 줄을 긋고 읽기는 하지만 지금도 그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책을 아낀다고 해서 꼭 책을 잘 읽는 것은 아닙니다.


심심하거나 한가로울 때 책장 앞을 서성거리면 많은 추억들이 물결처럼 흔들거립니다.


이 책은 홍지서림에서 샀었는데, 이 책은 대한 서림, 이것은 그때 ㅇㅇ한테 받았던 책, 이것은 경복궁 구경하고 교보에 가서 샀었는데....


책장에서 가장 오랜 세월을 지내온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선물로 받은 ´빵 나무´라는 손바닥만 한 책입니다.


수녀님께서 주셨습니다.



잘 잊고 잘 기억되지 않는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습관도 바꿨습니다. 더 이상 저는 젊지 않습니다.


젊지 않다고 해서 그대로 노인은 또 아닐 것입니다. 물론 노인이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 길에 들어선 것이 내 뜻만으로 되는 일도 아니지만 그 또한 하나의 선택받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남아 있는 것들에 시선이 갑니다.


조급하거나 초조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것은 청춘 靑春이나 어울리는 일이니까요.



밑줄을 긋는 일조차 눈치를 봐가며 싫었던 것이 호기로운 젊음 아닌가 싶습니다.


모르는 길도 씩씩하게 찾아가는 시절이 있었다면 아는 길도 물어서 가는 차분한 시절도 누려보고 싶어졌습니다.


밑줄을 긋는 만큼 저는 늙어갈 것이지만 그만큼 세상이 정답다는 표시를 곳곳에 해두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은 마음에 들어, 여기는 너도 꼭 읽어봐라, 예수님도 화가 많이 나셨구나, 기타 등등.



´명선이, 쥐바라숭 꽃, 금반지, 나´


지금 중학교 3학년 아이들의 국어 책에는 윤흥길의 ´기억 속의 들꽃´이란 작품이 나옵니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라는 소설은 많이 아실 것입니다.


아련한 추억입니다.


´기억 속의 들꽃´을 저는 신기하게 기억합니다.


옛날 TV 드라마, ´전우´에서 그 이야기를 봤던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소설을 읽은 것도 아니고 제목도 어제서야 알았습니다.


10살이 됐을까 싶은 어느 날 저녁에 그 드라마에 나왔던 ´강 위로 높다란 기찻길을 걸어가던 소녀´가 반가웠습니다.


이렇듯 나를 구성하는 어떤 것들은 먼 옛날에 머물고 있습니다.


사라지지 않는 옛날, 망각을 잊은 채 나를 지키는 옛날 일들이 책장에는 가득합니다.



오늘은 어디에 밑줄을 긋게 될지요.


우연처럼 금요일입니다.


저는 금요일에 태어났고 산이와 강이도 금요일에 태어났습니다.


별게 다 고마운 시월 첫날 아침입니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다.> 루카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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