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171

아침에,

by 강물처럼


찬찬히 빛이 내리는 호변을 산책하는 즐거움은 가을에 누리는 호사 가운데 하나입니다.

물결이 작은 바람에 찰랑거리며 반짝이는 시간과 공간 속을 거닐다 보면 마음마저 촉촉해집니다.


복잡한 머릿속도 한결 헐거워져 거기 어디엔가 다실 茶室 같은 방이 생겨납니다.


그 방에 앉아 있으면 ´지금, 여기´를 만끽하는 현상이 벌어집니다.


수많은 과거와 미래에 묻혀 낌새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스쳐 지나쳤던 ´현재´를 마주하게 됩니다.


살아가면서도 살지 못하는 그 오묘한 시간 말입니다.



´당신의 ´현재´를 재어드리겠습니다. ´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갖고 있는지는 측정 가능합니다. 잴 수 있습니다.


실력이란 것도 애매모호한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필요할 때마다 기준을 정해 실력을 측정합니다.


하지만 ´지금, 여기´를 얼마나 갖고 있는지 재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모두가 공평하게 누리는 시간이며 공간이어서 불만이 따로 없을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에게 ´지금, 여기´는 다 같은 분량으로 나눠져 있으며 그 모습을 제대로 드러낼 수 있을까.


누구나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고 믿지만 그것이 현재가 없는 현재라든지, 현재가 아닌 현재라고 밝혀진다면 그때 우리는 어떤 표정을 짓게 될까.


과거밖에 없는 세상에서 미래를 바라보는 삶은 텅 빈 유리병 같습니다.


속에 든 것은 사라지고 쓸모를 찾지 못하고 뒹구는 공병 空甁 말입니다.


´지금, 여기´를 길게 누리는 계절이 가을 아닌가 싶습니다.


진짜 순간은 내가 허락하는 순간이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가을 속을 걸으면서 혼잣말을 합니다.



추억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봅니다.


모든 순간을 추억으로 간직하려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이 갖고 있는 ´지금, 여기´를 물어볼까 망설입니다.


그거 유효 기간이 금방 지날 건데요....


그 말을 하려는데 벌써 저만큼 앞서서 가버립니다.



<너희가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 줄을 알지 못한다.> 루카 11:44



살아있음에 감사하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여기를 잘 사는 일인 듯합니다.


지금, 여기를 재어드리겠습니다.


그대의 지금, 여기를 지금, 여기로 가져오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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