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이 남자 친구

12년 된 육아일기에,

by 강물처럼


북한산에 다녀온 날이다.

따뜻한 물로 우선 씻고 테이블에 앉아서 머리를 말렸다. 17킬로미터가량을 걸었는데 의아할 정도로 멀쩡하다. 종아리나 허벅지가 당겨도 이상할 것 없는데 가끔 기침만 나올 뿐 다른 것은 이상이 없었다. 사람이 몸 상태가 좋으면 은근히 자신감 같은 게 붙어 기분도 좋아진다. 나이가 들면 그 경향이 더 심해지는 것 같다. 별거 아닌데도 산에 다녀오고 아무렇지 않으면 몸이 좋아진 거라고 내심 좋아한다. 사실 오늘도 약을 가지고 다니면서 잊지 않고 먹었다. 날씨가 차갑긴 했지만 산에 오르지 못할 정도로 추운 것도 아니었고 실제로 북한산에 도착해서 보니 나이 드신 분들이 많이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나보고 잘 오른다고 그랬지만 출발부터 속으로 마음먹었던 것은 딱 하나다. '민폐 되지 않기'

목표가 작아서 좋은 것도 있다. 나는 내 목표를 200% 달성하고 집에 돌아온 셈이다.

백운대 정상까지 페이스를 떨어뜨리지 않고 줄곧 잘 올랐다. 어렸을 적에 산에 다니면서 놀던 가락이 있어서 그런지 바위산은 내 적성에 맞고 소질이 있는 편이다. 전주, 내 어릴 적 놀이터 가운데 하나가 치명자산이다. 그 산을 다른 사람들은 '중바위산'이라고 부른다. 이름 그대로 바위가 뾰쪽하니 솟아있는 그 나름대로 운치가 있는 동네 산이다. 그 산을 얼마나 올라 다녔던가. 뛰어오르기도 하고 맨손으로 바위를 붙잡고 기어오르고 뛰어내리기를 반복하면서 산꼭대기까지 가는 것이다. 꼬맹이들이 무슨 군대 훈련을 흉내 낸답시고 그렇게 거길 오르락거렸다.


스무 살이 되어서는 멀리 영암까지 다니게 된다. 나는 아직도 월출산에 다니고 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월출산이야말로 바위산이다. 바위산에 군데군데 나무가 자란다고 생각하면 된다. 거기는 계곡을 타고 솟아오르는 바람이 일품이다. 월출산 구름다리는 몇 사람이나 건넜을까. 올해도 나는 거기를 거닐면서 바위들은 쓰다듬을 수 있을까.


하여튼, 그렇게 집에 와서 용산역에서 사 온 카카오 프렌즈 인형을 강이 생일 선물로 내놨다. 살 때부터 그 표정이 상상됐었는데 상상 이상으로 강이는 좋아했다. 그래 역시 통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니까, 사람 사이에는!

저도 기분이 좋았는지 그동안 모은 문화 상품권 두 매를 내놓는다. 나보고 책 사는 데 보태 쓰라는 것이다. 물론 내게 들어온 문화 상품권은 모두 산이 평가 문제집 사는 데 들어간다. 그래도 고맙다. 저도 뭔가를 내게 주고 싶었다니.

그러는 사이에 산이가 앞에 앉아 끼어들었다.

"아빠, 아빠 그거 알아? 강이가 남친 생겼대!"

강이야 성격도 좋고 그만하면 빠지지 않게 생겼으니까 남자 친구가 생겨도 언제든 생길 줄 알고 있었다. 산이가 여자 친구 생겼다고 했을 때는 응원도 해주고 그 집 엄마, 아빠하고 식사도 하면서 분위기를 밝게 했었는데 글쎄...

싫지 않으면서도 탐탁지 않은 것은 뭘까?

산이한테는 그게 누구냐며 이름도 묻고 어디 사냐고 묻고 내내 그랬었는데 강이한테는 그 말을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저도 그런 내가 어려웠는지 생일 선물로 받은 것을 꺼내놓고 애먼 이야기를 하느라 입만 바빴다.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나?

반쯤 농담 삼아 던진 말치고는 웃음기도 없고 맹맹한 맛이 났다.

"이사 가야겠다."

사실 심각한 것은 전혀 없다. 그런데 그것이 참 묘하다.

강이가 같은 반에 남학생한테서 고백을 받았는데 그 고백을 받아줬다고 그러는 것이 좋으면서 왜 싫을까.

세상에서 딸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아빠들이라던데 그래서 그러는 걸까.

음과 양은 서로 자리를 바꿔가며 순환한다는 것이 세상 이치다. 태양빛도 열이 식어가면서 밤이 길어지고 있는 가을이다. 어제는 64년 만에 찾아온 10월 중순 추위라고도 그랬다.

나 같은 사람에게 딸을 맡겼던 그 마음을 한 번쯤 돌아보는 가을이어야겠다. 딸을 가진 세상의 아빠들은 딸의 남자 친구나 애인, 남편들에게 어떤 소망을 가질까. 어떤 마음일까.

그들도 남자였기에 그리고 그들은 딸을 뒀기에 양쪽 다 헤어릴 줄 아는 인류가 아닐까. 불안한 존재들이 끄는 마차를 운전하는 마부, 어때? 그 솜씨가 무척 기대되고 요구되는 사람.

그게 아빠다.

딸 바보 아빠가 아니라 딸 가진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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