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
이렇게 써놓고 다음을 어떻게 이어야 좋을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이 확실히 센 말은 센 말입니다.
자기가 살아온 이력이나 경험에 따라 이 말에 동의하거나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이 말을 자기에게 빗대어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입히는 옷이 아니라 내가 입어보는 것입니다.
그게 정확할 것 같습니다.
어제 아침에 일어나서 왜 앓았을까?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여진처럼 한쪽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은 남아있습니다.
내 몸이어서 내가 더 알 수 있는 것도 있지만 내 몸인데도 다 알지 못하는 것도 많습니다.
그런 경계를 줄타기하듯 살아가는 일이 일상이라는 것을 새삼 또 깨달았습니다.
요즘은 특히 코로나 백신이란 것이 우리 생활의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어서 그야말로 기, 승, 전, 코로나입니다.
´건강하던´이라는 말보다 더 참담한 말은 ´멀쩡하던´이란 것을 코로나 뉴스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멀쩡하게 있는 일이 어떤 것인가 생각하게 합니다.
예전으로,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는 일이 불가능해졌다고 ´위드 코로나´를 준비합니다.
첨단 의료기기로 아픈 사람을 들여다보면 ´당연 當然´ 한 일처럼 원인을 찾아낼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너머를 묻고자 합니다. 그릇이 깨진 사실을 찾아낸 것이지 그릇이 깨진 까닭은 미궁입니다.
세월이 가면 낡기 마련이라는 말은 당연하기만 한 사실일까 싶은 것입니다.
저는 당연한 세계의 반대편에 우연 偶然 한 세계가 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우연과 당연이' 하루를 이루는 낮과 밤처럼 순서를 바꿔가며 하나의 세계를 꾸려간다는 생각이 어쩐지 보탬이 됩니다. 낮만 계속되면 피로하고 어두운 밤이 길면 우울해집니다.
내가 오늘을 맞이하는 일에는 ´연 然´이라는 글자가 배경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연이나 필연, 당연한 것들은 모두 ´연 然´이란 말을 어떤 식으로 보듬느냐는 태도의 문제가 됩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그들은 이 말씀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 루카 14:5-6
아무 생각도 없이 멍한 것을 망연 茫然이라고 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 앞에서 망연한 기분이 됩니다.
그것은 아득한 것들 앞에서 드는 기분입니다. 멀고 넓어서 끝없이 펼쳐져서 가뭇없는 것들은 현기증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내가 그를 따라가지 못할 때, 속도가 속도를 견디지 못할 때 어지럽습니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
지금은 처음과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내가 입을 옷이라고 하면 처지가 조금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굳세고 용감해서 일일이 희번덕하지 않는 것을 의연 毅然 하다고 하며 아시다시피 자연 自然은 조화로운 것의 일체입니다.
스스로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 자연이라고 하면 ´연 然´ 이란 것은 모양도 형태도 없는 허공이나 바람, 시간입니다.
저는 저 글자가 멋스럽습니다.
다른 외국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저 글자를 쓰고 있으면 구름 하나 정도는 높아진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
한 번에 소화시키지 못할 것은 나눠서 먹는 것이 좋습니다.
저 세 부분에서 가장 영양가 좋고 맛있는 부분은 어디입니까, 거기를 우선 드리고 싶습니다.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어느 부분이든 우리는 한 토막씩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부를 다 먹지는 못하고 자기 앞에 놓인 그것을 맛있게 소화시키는 것이 우리의 본분인 듯싶습니다.
´아니다´를 정말 맛있게 먹고 나면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니다´라는 맛일 뿐이지, 전체 문장의 맛은 아닙니다.
마치 우리는 거대한 코끼리를 처음 만져보는 장님처럼 그렇게 맛을 보는 것입니다.
전체를 아우르고 전체를 해석하는 분은 아무래도 하늘에 계신 하느님이 맞다는 생각입니다.
조물주는 ´연 然´을 만드시고, 사람은 그것을 각자 자기 몫대로 끌고 집에 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