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195

아침에,

by 강물처럼

아이들에게 한 가지를 가르쳐야 한다면 글을 쓰게 하십시오.


무엇인가를 자기 밖으로 써내는 일은 쉬우면서도 어렵습니다.


생각이란 것이 손에 잡힐 듯하면서도 허공인 것을 안다면 그게 가르쳐서 될 일도 아닌 것을 실감할 것입니다.


그때 절망하지 말고 그때야말로 단어를 다시 꺼내 과녁을 응시하며 화살처럼 문장을 쏘는 것입니다.


자연이 사람에게서 멀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자기 좋을 때에는 밤낮없이 즐겨 찾더니 제풀에 지치고 나면 언제 봤느냐 싶은 것이 사람입니다. 철저하게 필요에 길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이 기후 변화로 인한 해수면처럼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카나리아가 되고 있습니다.


사람의 감각으로는 구분하지 못하는 일산화탄소가 땅속 깊은 탄광에서는 새어 나옵니다. 광부들은 카나리아에게 자기 목숨을 의지하며 일했습니다. 카나리아가 횃대에서 떨어져 죽으면 그곳에서 서둘러 빠져나와야 했습니다.


사람이 자연에게서 멀어지면서 잃어가는 것들이 많아졌습니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것들에게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맡기려고 합니다.


´글´이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경계선을 이룰 것입니다.


그곳이 넘어가는 순간 우리는 다른 세상이 아니라, 다른 ´우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컴퓨터를 닮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을 닮은 컴퓨터가 더 매력적일 것입니다. 효용 가치도 물론 뛰어날 것이고 무엇보다 합리적이며 사고도 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땅을 우리가 매일 팔아먹고 있습니다. 지금이 최고가, 매일 듣는 그 소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



성경은 사람에게서 사람에게 전해지다가 필사되고 책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는 사이 아무 일도 없이 그대로 처음 말씀 그대로 다 옮겨졌다고 믿는 것은 이 넓은 우주에 우리만 살고 있다고 믿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저는 성경을 연구하는 신학자도, 성직에 몸담고 있는 성직자도 아닙니다. 아마 1000년 전쯤에 이렇게 떠들었다가는 불경죄나 신성모독죄로 다스려졌을 것입니다. 저 문장은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이와 같은 경험을 했었던 누군가가 곁들였을 수도 있습니다. 겁을 주고자 힘을 주어 말하는 ´뽄새´에 사람 냄새가 가득합니다. 여기도 그렇습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훈계와 가르침의 결은 무수히 다양합니다. 숲에 소나무와 활엽수 그리고 다른 많은 수종 樹種이 거기 모여 살면서 서로의 수격 樹格을 존중하는 것을 보면 문득 성경에 쓰인 문장들의 호흡을 떠올릴 때가 있습니다. 나무 하나하나, 돌멩이 하나하나가 구성진다는 생각이 들면 걸음이 얌전해지고 마음이 경건해집니다. 그 순간 숲은 성전 聖殿이 됩니다.


다른 사람이 가미시킨 문장이라고 얕잡아 보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 정성으로 살펴봅니다.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훈계로 담아놓습니다. 여기를 꼭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 사람이 누구든 인간적이다 싶어서 설핏 애잔한 것도 있습니다.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을 꺼내러 내려가지 말고,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 > 루카 17:31



오르페우스의 신화 神話 같은 말, 간절한 것이 시공간을 통과하고 사람에게 적중하는 말, 그렇게 부탁하는 말이 저는 성스럽습니다. 늙은 엄마가 예순 살 먹은 아들 보고 조심히 다니라고 이르는 말에는 우리가 잃어가는 소중한 것이 아직 담겨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 그런 엄마도 요양병원에 계시니 세상은 말해 줄 사람도 말을 들을 사람도 회원으로 가입시켜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종교는 최후의 보루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이미 진 것입니다. 흔들리며 피지 않은 꽃이 어디 있겠냐고 하지만 흔들린다고 해서 다 꽃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떨림과 불안은 다릅니다.



새벽에 구시렁구시렁 말이 많았습니다.


감기하고 우울한 것은 조심하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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