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미했던 것이 그나마 나아졌습니다.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 일곱 형제 그리고 죽은 이의 아내.
어리석고 둔해서 이곳을 몇 번이나 지나고 오늘에야 눈에 들어오는 풍광이 있습니다.
기껏해야 내가 할 말이라고는 그 여자가 너라면, 너는 누구의 옆에 서 있을 것이냐,였습니다.
하나를 만나 그 하나와 해로 偕老 하고 그러다 세상을 떠나는 일은 축복일 것입니다.
그런 삶을 누구나 바라 마지않겠지만 그것은 쉬운 일인가 싶습니다.
다 오염되어 바다로 흘러드는 강물이야말로 경멸스럽다던 니체의 말은 차라리 우리에게 약이 됩니다.
살면서, 사느라고, 살아가는 일이 매 순간 뉘우침이 되고 회개가 되는 도량 道場입니다.
누구의 것, 누구의 재산, 누구의 아내, 누구의 남편, 누구의 자식, 나중에는 누구의 묘인가 물을 것입니다.
그마저 세월이 강물처럼 흐른 뒤에는 누가 물어올까요.
그 뒤에 남을 말은 무엇 일지요.
평생 싸움만 하다가 말았다는 말이나 평생 화목하고 다정하게 살았다는 말이 그때에도 우리를 기억할지요.
늦가을의 정취가 마음에 듭니다.
아직 가을의 절정은 더 있어야 합니다.
나뭇가지가 휑하게 드러나고 바람이 땅 가까이를 쓸면서 지나가는 풍경, 그다음에 올 것입니다.
손맛 때문에 추강 秋江에 나오는 강태공들처럼 낙화 落花보다 알뜰한 불꽃을 기다립니다. 고도를 기다립니다.
나도 알지 못해서 부르지도 못하고 쓰지도 못하는 그것을 내내 기대합니다.
어제는 두 사람을 위해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15년쯤 전에 그리고 한 달 전쯤에 세상을 떠난 두 사람의 이름을 적어봤습니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두 사람의 미소뿐입니다. 어떤 것이 소용 있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의미가 없어도 괜찮습니다.
내가 하는 일도 그리고 했다고 하는 일들도 모두 바다로 흘러가는 도중에 있었던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바람이 부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낙엽이 흔들리다 떨어지는 일은 그저 그런 일 아닐까 싶습니다.
다만 미소 지을 일이 끊기지 않도록 불씨처럼 간직할 일입니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루카 20:38
거기에 맡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내가 주인은 아니고 잠시 이곳을 지나다 얼떨결에 밥도 얻어먹고 경치 구경도 했습니다.
살아있는 돌아가신 분들이 가득 열리는 만추 晩秋의 나무를 지켜보는 꿈을 꿉니다.
내 안에 네가 있다면, 그것이 연 緣 아닌가 싶습니다.
11월은 떠난 이들을 위한 달이 하늘에 가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