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214

아침에,

by 강물처럼

그런 때 기분 좋지 않으십니까.


슬그머니 웃음이 나올 때.



또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괜스레 눈물이 나려 하는.



예전에는 바람이야말로 살아있다는 말의 동의어라고 생각했습니다.


높은 곳에 올라 바람에 다 맡겨놓고 앉아있으면 그대로 날아가도 좋을 것 같다는 감각.


그 감각이 사랑스러웠습니다.


태백산이나 소백산에서 품는 바람은 그 맛이 - 비록 낚시는 할 줄 모르지만 - 대어를 낚는 태공의 손맛에 견줄 만한 것이었습니다. 덜덜 떨면서 후회하면서 왜 눈바람 속으로 찾아가는지, 철없는 아이처럼 좋아했습니다.


그런 사이나 경계에서 맞이하는 바람은 생생했고 싱싱했습니다.


구름이나 바람, 영원히 순간인 것들을 쫓아다녔습니다. 동경했습니다.



지금도 아예 다 사라진 감각은 아닙니다.


이생진 시인처럼 어디 섬에라도 가서 한 달만 살다 나왔으면 싶은 마음이 울컥 일어나는 날들이 있습니다.


거기 아무 뫼똥 앞에 누워서 파도 소리 듣다가 잠이 드는 아련한 꿈을 꿉니다. 여전히 철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요.


아무도 없는 거실에서 혼자 웃고 있는 나를 보면서 살아있다는 신호를 수신합니다.


누가 살아있다.


누가, 그것은 아무래도 좋다.


어떤 살아있음이 보내는 전파를 받아 적습니다. 내 몸으로 받은 것들이 신호로 전환되어 감각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이 웃음이며 눈물 같은 것이고 한숨이나 아련함 또는 심심한 기다림으로 표상 表象 하는 예술입니다.


삶이 예술 같은 것이었구나.



마찬가지로 어떤 소멸과 이별 또는 사라짐이 초침처럼 또박또박 시치미를 떼어가며 대거리합니다.


그때에도 나는 수굿하게 지나칠 수 있다는 것을 오십이 넘어가면서 하나 배운 듯합니다.


아직도 출렁이는 너는 긴하구나. 네 마음이 장하다. 사람이든 무엇이든 그럴 줄 아는 것이 신령스럽다.


복 있어라. 복 받아라. 네가 복이다.



사람은 변하지 않으면서 변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사실은 그러고 있습니다.


다만 밑동이 듬직한 느티나무의 나이테처럼 살아서는 확인할 길이 없었으면 합니다. 그것은 스님의 사리처럼 나중에 처연하면서 영롱하게 또르르 소리 냈으면 합니다. 물고기 모양의 풍경이 찰랑거리며 바람 손을 잡았다가 놓는 일순 一瞬.



어제 금요일 아침 미사 복사를 서면서 웃음이 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여기에서 이러면 안 되는데.


자꾸 회전되는 문이 있었습니다. 거기로 장면과 장면이 이어지고 생각이 무늬를 장만해 놓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 아무래도 바람직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경건해야 할 미사 시간에 말입니다.



성체를 모시는 할머니들을 보고 - 이 버릇이 고쳐지지 않습니다. 저는 벌써 50년 동안 할머니들을 할머니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또 서러운 생각이 드는 것은 무엇인지 정말 상태가 좋지 못했습니다.


한쪽에 조용히 앉아 계시는 할머니 수녀님이 늘 궁금합니다.


석 달을 궁금해하다가 저번에는 세례명을 살짝 여쭈었습니다. 목소리가 작아서 희미하게 들었는데 제 기억이 맞는다면 ´요한나´ 수녀님이십니다.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순간´


젊었을 때는 순간을 동경했고 이제는 순간을 살아갑니다.


그것을 설명하기는 매우 어려울 듯합니다.


그것은 감각일 수도 있고 경험이기도 하면서 또 밥 먹는 일 같습니다.



설명은 잘하지 못하겠지만 사람들이 말하는 ´은혜´가 이런 것 아닐까 싶은 것이 제 희미한 대답입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 마태오 10:8



이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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