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215

아침에,

by 강물처럼

대꾸할 말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유쾌했습니다.


잘못을 이렇게 깨닫게 되면 반가운 생각이 감돌아서 여운이 오래 남습니다.



어디 가서 그런 소리 잘 안 들어 봤는데, 따끔하게 지적당했습니다.


지난 토요일 밤이었습니다.


저는 일찍 잠들었고 아마 5학년짜리 강이 방이었을 겁니다.



강이 : (엄마를 앉혀놓고) 우리 식구들은 국어를 다 못하는 것 같아.


강이 엄마 : (이것은 또 무슨 소리?)


강이 : 엄마, 국어가 뭐야?


강이 엄마 : 국어가 국어지, 뭐야.


강이 : (숨 한 번 들이쉬며) 엄마, 국어는 범위가 넓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대화´도 있어.


강이 엄마 :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어렴풋이 짐작했다.)


강이 : (말 나온 김에 대차게 나간다.) 대화가 뭐야?


강이 엄마 : 뭐긴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고 내 말도 하고 그러는 거지. (자세를 고쳐 앉는다.)


강이 : 내가 엄마처럼 말하면 (그러면서 평소의 엄마 말투를 흉내 낸다.)


기분이 어떨까? 아빠도 다른 국어는 잘하는데 대화는 못하고 오빠도 마찬가지야.


강이 엄마 : ..........


강이 : (마무리 지으며) 엄마도 국어 공부를 좀 해야 할 거 같아.



일요일 하루는 국어 공부하느라 조심했습니다.


공부를 하면 조심해지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 허울 좋은 공부만 했던 것이 밝혀진 셈입니다.


책에 줄을 그어가며 읽는다는 말씀을 드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좋아서, 마음에 들어서, 기억하고 싶어서 그런다고 생각했는데 조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나 생각되었습니다.


전에 없이 문장이 다들 수고롭다는 감정이 생겼습니다.


인간애는 기본적인 것인데 대충 챙기고 살았던 것을 고백합니다. 사람이 쓴 문장들 앞에서 설피설피 뒷걸음치거나 뻣뻣하게 굴었습니다. 기껏 내 앞에 앉은 사람들에게 보이는 에티켓 정도로 인간적이라는 것은 부끄러움의 다른 말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무슨 말이 잘 써지지 않는 것을 달게 받습니다. 어떤 말이 머뭇거리는 것을 환영합니다. 더욱더 눌변 訥辯으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사이다 발언´ 같은 말은 내 사전에는 없을 듯합니다.



종교 있는 사람들도 묻고 종교 없는 사람들도 저에게 묻던 질문이 있습니다.


성당에서는 왜 ´신부 神父´에게 죄를 고백하느냐.


사람이 사람한테 그러지 말고 하느님에게 ´직접´ 고백하는 것이 맞지 않느냐.



그 질문은 마침 오늘 복음에 나오는 장면으로 대신 바꿀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



가톨릭은 사제의 인격 안에 머무는 그리스도에게 죄를 고백합니다. 사제는 사제에게 고백하고 신자는 그 사제에게 고백합니다.


계급이나 권위의 표상 表象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벌써 오래전에 그 성채는 다 허물어졌을 것입니다.


사람은 지극히 합리적이니까요.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종교가 없는 사람과 종교가 있는 사람으로 세상은 이뤄졌습니다.


그것은 선과 악의 구조는 아닙니다. 종교 없는 사람들 안에서도 층층이 다릅니다.


종교 안에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저마다의 삶을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도 하나의 책이라고 여깁니다.


책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 꼭 책이 있어야 사는 것은 아닌 것처럼 그것은 책입니다.


하지만 책이 있다고 다 읽는 것도 아니고 다 읽었다고 그 책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사람은 별 차이도 없습니다. 잠깐의 차이로 웃고 행복해할 뿐입니다.


대부분의 시간은 고요하게 지나고 가끔 손님이 찾아오듯이 행이나 불행 같은 이벤트가 엮입니다.


종교는 고요한 시간에 더 고요하게 찾아오는 고독입니다.


그 고독은 이상한 것이어서 사람을 사람답게도 하며 사람을 성스럽게도 합니다. 사람을 모든 것이 될 수 있도록 간지럽힙니다.


시도 쓰고 소설도 쓸 수 있으며 대화 對話가 무엇인지 깨닫게도 합니다.


물론 종교 없이도 그만큼 믿음직스러운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인류에게는 굿 뉴스 Good news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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