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257

아침에,

by 강물처럼

가만 보면 ´가스 라이팅´ 아닌 것이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무엇인가 의존하며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믿고 맡긴다. 그것이 무엇이든 내가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특별한 존재입니까.


믿음이 주체적이어야 한다는 마땅함이 등장하는 대목입니다.


내가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을 맡기는 일일수록 내 믿음은 자발적이어야 하고 나와 내 상황을 내가 먼저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이를 맡기는데 상대의 말만 듣고 맡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기만 믿으라는 사람을 믿고 싶어 하는 마음은 순진함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들은 그저 순진할 뿐입니다. 사탕발림 하나로 다 해결이 되고 맙니다. 착한 것과 순진한 것은 결이 다릅니다.




영화나 TV, 어떤 광고든 시도가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내가 따라오길 바라는 시도.


물론 공익적 바탕에 선한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바람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우리가 우리를 바라보는 방식이며 우리가 애써 해석하고 내린 정의를 왜곡하거나 무시하는 방식으로 접근한다면 문제는 다릅니다. 이런 말들은 양면의 칼이 됩니다.


´이건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다. ´


건강해지라고 건강식품을 광고하는데 위협적입니다.


똑똑해지라고 머리 좋아지는 책을 소개하면서 무시합니다. 은근히 그리고 철저하게, 그럴수록 나는 거기에 빠져듭니다.


´지금 이것을 고치지 않으면´


가스 라이팅, 심리 지배를 하는 점령군들의 구호이며 그들의 세뇌 방식입니다.


그들은 떼어내려야 떼어낼 수 없는 위치에서 나를 점령합니다.


부부, 형제나 자매들 사이에서 그리고 친구나 연인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들은 믿을 만한 사람들이며 좋은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의존하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내가 의존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되어 있습니다. 나만 아는, 나만 찾는 너를 만들어 놓고 그들은 웃습니다. 보이지 않는 줄에 매달려 어느 순간 우리는 꼭두각시가 되어 그처럼 생각하고 느끼면서 자신을 못 미더워합니다. 그러다가 전부 잃습니다. 나를 중독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옳지 않습니다.




바보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정작 그러면서도 나는 확신에 차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이비나 다단계에 빠진 사람들의 기본 패턴입니다.


혼자서 가라, 그 말에 쓸쓸함 대신 사랑과 자비가 가득하다는 것을 늦게서야 알아차렸습니다.


오죽하면 무소의 뿔처럼 가라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외딴곳을 보통 명사처럼 흔히 사용합니다. 기도는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말 없는 말씀을 두고두고 하셨습니다.


정작 내가 바보가 되면 나를 그렇게 만든 사람들은 나를 외면하거나 바보로 대할 것입니다.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내가 나를 바라볼 줄 몰라서 거기에서 시작된 비극입니다. 그것이 잘못이었습니다.


허전한 사람일수록, 못 배운 사람일수록, 내가 나를 아끼고 챙겨 바라봐야 합니다. 이기적인 내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튼튼한 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상대도 잘 보입니다. 나와 상대를 같이 잘 알고 있으면 서로에게 믿음이 됩니다. 한쪽으로 치우치지만 않아도 오래갈 수 있습니다. 아파트 건물이 무너지는 일처럼 사람이 무너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서로 믿을 수 있으면 어떤 상황이라도 헤쳐가게 됩니다. 오히려 힘이 됩니다. 그것이 바른 믿음입니다. 푸른 풀밭에 이 몸 뉘어 주시고 물가로 나를 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없어도 되는 것이 정말 좋은 것이며 내가 없어도 네가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없어도 되길 바랍니다. 그것을 기도합니다. 너무 슬프게 하는 것도 마땅치 않습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 내 소원은 그것이 되어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러고도 이어지는 것이니까요. 거기에 닿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마르코 3:30

작가의 이전글기도 2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