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대목을 패러디해 보겠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종잣돈을 투자해 놓고서,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그 돈이 구르기 시작하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놀란다.
돈이 저절로 자가 번식을 하는데, 처음에는 소고기가, 다음에는 명품 가방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고급 승용차가 내 집 앞에 생겨난다. 액수가 커지면 그 사람은 곧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건물을 쌓을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돈이 돈을 버는 세상, 더 이상 꿈꾸지 마십시오, 당신의 현실입니다.
이런 광고가 만들어지면 사람들 반응이 어떨까 싶습니다. 꿈쩍할지 꿈쩍도 하지 않을지요.
방자하다 할 것입니다. 감히 성경에 빗대어 얼토당토않은 말을 꺼내다니요. 머리에 물이 말라가면 사고는 느려지고 이성은 산만해지며 사람은 거칠어집니다. 아무래도 물을 한 잔 마시고 시작했어야 했습니다. 다만 저는 성경을 아낍니다. 그리고 나와 내 주위, 그 밖의 세상에도 애착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까운 것이 아니라 안타까움입니다. 연민입니다. 그마저도 건방진 소리인 줄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저만치 앞서가는 님 뒤로, 그림자 밟으려 하니, 서러움이 가슴 애이네. ´ 그 노래 그대로입니다. 그리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백발도 사랑하는 까닭´인 것도 같습니다.
코로나19라고 해야 할지 오미크론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가까운 친구가 확진 판정을 받았다며 생활치료센터에 들어가게 됐다고 했습니다. 하루 확진 환자수 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1월 26일 현재 신규 확진자 14, 518명이나 됩니다.
´네 잘못이 아니니까. ´
저도 모르게 그 말이 끼어들었습니다. 한숨을 온점처럼 찍고 통화를 마쳤습니다. 하지만 그 말 하나 잘했다는 생각이 내내 들었습니다. 말과 말 사이, 생각과 생각 사이가 나를 안도시킬 때가 있습니다. 그 보이지도 않는 틈에서 나는 것이 나를 평화롭게 할 때가 있습니다. 위기는 위기인 듯합니다. 작은 것들에 의지해가는 것은 이러나저러나 애틋합니다.
높다란 건물을 향해 달려가는 그 마음이 얼마나 수고로울지, 물 한 잔 따라놓고 길가에서라도 기다릴까 합니다.
우리는 기다릴 줄 아는 사람으로 자라왔는지 그렇지도 못했는지요.
연애의 행방은 그 기다림에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신앙이나 종교, 겨자씨.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마르코 4:31,32
예수님은 말씀 하나를 감춰두셨습니다.
이거야말로 ´보물찾기´입니다.
저 말씀 어딘가에 숨겨진 그것이 바로 ´기다림´ 아니겠습니까.
기다림 없이 큰 것들만 찾으면 맹탕이 될 수 있습니다.
어릴 때 우리가 자주 했던 말, ´꽁탕´ 그것을 뽑고 싶지는 않습니다.
진짜 기다림은 달달할 줄 압니다. 단맛이 배면 잘 기다린 것입니다.
그때 꿀맛이 납니다. 꿀이 뚝뚝 떨어집니다.
새들이 깃들고 하늘의 해도 거기 머물다가 서산에 기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