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 권영상
나비들이
소 발자국에 모인
빗물에 모이다.
나비 날아간 뒤
가보니
거기 하늘이 있다.
파란.
그쪽 하늘로 가는
창문인 줄 알았나 보다.
동시는 언제든 쓸 줄 알았다.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가 내미는 숙제를 해결해 주면서 으스대는 어른은 없다.
아이들끼리 떠드는 말이 어려워서 못 알아듣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싱겁고 쉬운 거라서 흥미 자체가 없어서 안 들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 쉬운 말도 자주 안 쓰고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사라지고 없다.
그렇다고 어려운 말들을 줄줄 뱉어낼 줄 아는 것도 아니어서 어정쩡한 사람이 되어간다.
말이 무미건조해지면서 사람도 그와 같아진다.
조심, 또 조심해야 할 일이다.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사람이라 '동시'를 쓸 필요가 있고 읽기도 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저 연필 하나 들면 엎어진 물 잔에서 물이 번져 나가듯 동시 한 편은 뚝딱 해결될 줄 알았는데 아니다.
아무 때나 나만 좋으면 그거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술술 써 내릴 줄 알고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살았는데 그게 아니다.
아이가 벌써 12살이 다 지나가고 있는데 아빠 손으로 만들어 놓은 '동시' 한 편이 없다.
이거야말로 처지가 우습고 너그럽게 봐줄 일도 아니다.
게을러서 안 썼다면 직무유기요, 가볍게 보고 지나쳤다면 과실로 인한 손실이 크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메마른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되돌릴 것인가?
응급차라도 불러 병원에 실려가야 할 처지에 놓였다.
그 쉬운 말들을,
그 조그맣고 올망졸망한 언어들을,
빛나는 아침 이슬을, 나는 다 잃고
어느 벌판을 걷겠다고 나섰던 것인가.
누구의 손을 잡겠다고 나댔던 것인가.
떨어지는 해는 무슨 낯으로 볼 것인가.
언어를 잃은 사람은 입이 없어진 것인데
말을 찾지 못하는 사람이 무슨 심장으로 살겠는가.
내 발로 찾아가야겠다.
더 늦기 전에 서둘러 가야겠다.
중환자, 동심童心을 잃고 어른으로 사는 중증 환자를 돌봐주는 곳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