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기관차를 위하여 / 안도현
기관차야, 스스로 너는 힘을 내 달린다고 생각하겠지
하찮은 일에서부터 세상을 움직이는 큰일까지
혼자 힘으로는 될 수 없는 게 너무 많다는 것을 모르고
기관사가 타고 서울역에서 출발하기만 하면
어디든 닿을 수 있다고 너는 생각하겠지
그래서 떠나기도 전에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구나
가령 객차에 한 사람의 손님도 타지 않았다면
화물칸에 라면 상자 하나 싣지 않았다면
비록 떠난다고 해도 너는 우스운 쇳덩어리일 뿐
그 누구에게도 추억이 될 수 없을 거야
이 세상 끝까지 얼마나 많은
철길들이 서로 어깨 끼고 있는 줄도 모르고
부산이나 목포까지 갔다 왔다고 기적을 울리며
플렛포옴으로 들어오는 기관차야, 자만심을 버려야 해
국경을 건너고 거친 대륙을 횡단하기 전에는
한반도는 슬픈 작은 섬일 뿐이야
내 어린 시절, 기차를 몇 번 타봤는지
얼마만큼 먼 곳까지 타고 갔다 돌아왔는지 내기할 때마다
시골뜨기 나는 미리 주눅이 들곤 했었는데
나중에 커서야 알았지 세상을 많이 아는 것도 어렵지만
세상하고 더불어 사는 건 더욱 벅차다는 것을
이제 슬쩍 너에게만 말해 줄 게 있는데
기관차야, 요즈음 사람들이 기차를 타고
삶은 계란을 잘 사 먹지 않는 까닭을 말이야 그것은
삶으로부터 그만큼 멀리 떨어져 있다는 뜻이고
혼자 여행을 떠나는 일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란다.
그저 스치고 지나가는 간이역의 이름처럼
앞으로 남은 많은 날들이 너를 녹슬게 하겠지만
기관차야, 철길 위에 버티고 서 있지 말고
새 길을 만들어 달릴 때 너는 기관차인 것이다
끝이다, 더는 못 간다 싶을 때 힘을 내
달릴 수 있어야 모두들 너를 힘센 기관차로 부를 것이다
당신은 기억력이 좋은 사람인가요?
예전의 일들을 하나씩 잃어가는 것이 맞을까요? 아니면 잊어버리는 것일까요?
기관차라고 쓰고 기차라고 나는 읽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시를 세 번째 읽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잃다와 잊다는 말을 내 나이 어디쯤에서 나는 그 두 가지를 바라보며 이야기하게 될까?
공연히 머릿속에 맴돌아 잠시 머뭇거리기도 했습니다.
의미기억이란 말을 들어보셨나요?
당신이 학교에 다닐 때 열심히 그야말로 열심히 읽고 쓰면서 머릿속에 저장해뒀던 기억들이 그것이랍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쉽게 떠오르고 꼿꼿한 줄기처럼 당신의 당신을 지탱해주는 기억이지요.
치매에 걸려서도 중얼중얼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은 모두 책에서 봤던 것들이라는 사실이 어쩐지 서글프기도 할 겁니다.
당신과 내가 만났던 봄날의 기억은 에피소드 기억이라고 부른답니다.
경험으로밖에 다스려지지 않는 가슴에 담기는 단편들의 이름입니다.
좋은 것들이 세월과 함께 날아가듯이 에피소드 기억은 내가 수그러들면 저도 그렇다네요.
갖고 싶어도 그것은 마음뿐이고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그렇게 나를 빠져나가겠지요.
그러는 동안에 당신은 당신으로 내게도 당신에게도 남아있지 못하겠지요.
하지만 가슴에 담기는 것들은 그냥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 잊겠지만 봄날처럼 기억 속에 남아서 꽃길을 걷는 꿈을 꾸다가 깨는 날도 있을 겁니다.
당신이 '기관차'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니 당신이 기관차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는 못 간다 싶을 때 힘을 내 달릴 수 있는'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사람도 좋아하고, 풍경도 좋아하는 당신이 '힘센' 기관차가 되어
이 골 저 골 심심하지 않게 기적소리도 울리면서 먼 곳까지 곧장 잘 달려가는 모습은 정말 상상만으로도 행복합니다.
'뭣이 중한디'
사람 우스워지는 것도 한순간이라던 당신이 그저 쇳덩이처럼 떵떵거리지 않아서 나는 그것도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하늘이 좋습니다.
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