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 이성복

시의,

by 강물처럼


그날 / 이성복


그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前方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역전驛前에는 대낮부터 창녀 娼女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미수금未收金 회수回收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愛人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 점占 치는 노인과 변통便通의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시내市內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문학은 한낮의 악몽이에요. 죽을 때까지 꿈에서 진땀을 흘리며 사는 게 인생이지요. 최민식이란 배우가 이순신을 연기하는 격인데, 최민식이 죽을 때만큼은 이순신으로 죽지 말고 최민식인 걸 깨닫고 죽어야 해요. 나는 삶이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꿈을 못 벗어나는, 그 상태를 쓰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요.'


시인의 인터뷰 기사가 옆에 서서 나를 내려본다.


그리고...


남들 바쁜 이른 아침에 혼자서 가게에 찾아가 소주 한 병을 사서 품에 감추고 들어오는 사람을 넌지시 바라보며 다짐했다. 가슴속에서 원망과 울분 비슷한 것이 솟구쳤지만 새들이 겨우 눈뜨고 짹짹거리는 아침에 그를 나무라기에는 내가 너무 슬플 것 같아서 그냥 다짐만 했다.


'그렇게 마시다가 너 죽어도 나는 울지 않겠다.'


섬으로 섬으로 기어들어갔다.

아무리 작은 섬이라도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어김없이 '점방'이 있었고 점방이 있는 곳에는 '소주'가 놓여 있었다.

그 당시 내 눈에 세상은 모두 '알코올 중독자'나 '예비 알코올 중독자'처럼 보였다.

일직선으로 추락을 기다리며 줄 서고 있는 빨간 불빛들 같았다.

집단 최면에라도 걸린 것처럼 술집은 불야성이었고 술 마시지 않고 길을 걷는 사람은 드물었다.

여기 있다가는 술에 사람을 잃겠다는 생각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진 저 의지 갖고는 아무것도 못하겠다 싶어 살리겠다고 도망친 곳이 겨우 섬이었다.

겨우 섬이었다.

섬에 단 하나 있는 - 겨우 구멍만 뚫어놓고 숨을 쉬는 무슨 바닷게가 사는 집처럼 그런 - 판자떼기로 엮은 곳에서도 소주가 있었다.


'죄송한데, 혹시 여기 누가 처음 보는 젊은 사람이 소주 사러 오거든 팔지 말아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한 사람을 지키겠다고 한 사람이 따라붙었지만 감옥이 아니고서 어떻게 내내 그를 붙잡아 둘 수 있었겠나.

낮잠인지 무엇인지 이제는 기억도 없지만 그날 오후 나는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해풍에 머릿결이 날리는 너른 서해바다를 앞에 두고서 소주를 몰래 마시고 잠들어 버린 그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코딱지만 한 가겟집 여자에게 찾아가 겨우 이 천 원짜리 소주를 그렇게도 팔아야 했었냐고 따지려다가,


'왜 파셨어요, 제가 그렇게 부탁드렸잖아요?'


그 말 한마디 쏟아놓고 돌아왔다.

별 이상한 사람이 다 있네 싶은 그 아줌마 표정은 그날 이후에도 여전히 살아서 그 섬과 함께 둥둥 떠다녔다.


세상은 술 천지였다.

사람들은 술에 센 사람과 약한 사람 두 종류로만 보였다.

그러고서 열심히 잘 돌아갔다.

누가 떨어져 나가도 나갈 것 같은 회전의자를 타고 쌩쌩 시끄럽게 웃어가면서 돌아가는 세상이었다.

모두들 아무렇지 않은데 나만 어지러웠다.

모두가 병들었는데 한 사람만 아팠던 '그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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