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짜리 여행 1

아빠가 쓰는,

by 강물처럼

강이는 어디든지 가고 싶어 하고 산이는 집에서 시간을 보내자고 그랬다.

강이 마음도 잘 알겠고 산이도 이해가 됐다.

결국 우리는 어떻게 했을까?

2020년 7월 11일, 토요일에 우리는 밖에 나왔다.

엄마도 몇 주 전에 산책에 다녀오면서 한 달에 두 번은 짧게, 두 번은 길게 걸어보자고 제안했었던 것을 다 잊어나보다.

오늘 얼마나 걸을 것인지 자꾸 물어본다.

아빠는 일주일 전부터 Fumiko's Diary라는 일본의 한 소녀가 태평양 전쟁 동안에 쓴 일기를 읽고 있다.

그 책은 95년 내가 처음 알게 된 일본인 야스코 이즈우미 선생님에게 선물로 받은 것이다.

25년이나 됐구나 생각하니 꽤 심각해졌다.

내 인생의 절반을 지니고 있었으면서 겨우 19페이지에서 멈춘 채 그 세월을 흘려보낸 것이 못내 미안해졌다.

그래서 하루에 두 페이지, 한 장씩 읽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실행하는 중이다.

전혀 부담가지 않고 술술 잘 읽히는 편이다.

진작 그럴 것을, 사람은 너무 늦게 깨닫는 것들이 많다는 생각을 하며 지내는 요즘이다.

어쩌면 집에 있고 싶다는 산이의 의견을 설득하게 된 가장 큰 요인은 그 책이었는지 모른다.

10분, 한 장, 하루, 그런 작은 것들이 삶을 구축해 가는 매력을 아빠는 실감한 것이다.

너희에게도 자주 하는 말이지만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글을 쓰다 보니 아빠는 나도 모르게 근사한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

근사한 사람이란 것은 잘생겼다거나 무슨 성공을 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전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좋은 것들을 꿈꾸기 시작했다는 거다.

일기가 기도가 되고 기도가 한 권의 에세이가 되는 변화를 내가 만들고 있더라는 현실감은 사람을 낭만적이게 만들더라.

처음 쓰기 시작한 날이 있었던 것에 고마워하고 그 인연이 흔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깨닫는다.

내가 하는 일이 다 내가 원해서 되는 것도 아니더라는 것을 알 때 사람이 차분해지는 마법도 경험하고 있다.

고마운 마음에 고마운 생각을 얹어놓고 사는 기분이니까 그야말로 마법이라 할만하지.


우리는 팀워크가 좋은 어떤 팀이 되어가는 것 같아서 반갑다.

산이 너는 어쩜 그렇게 완'벽'하'게' 지리를 모를 수 있는 거냐.

전라남도는 어디이며, 충청남도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지 않다는 것이 아빠는 신기할 정도다.

토요일에 우리가 점심을 먹은 곳은 전라남도 함평이었고 바다 위로 놓인 긴 다리는 신안군에 있는 섬을 연결한 '천사 대교'였다. 아빠도 소문은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직접 눈으로 보고 거기를 달려보니까 정말 멋지더구나.

압해면에서 시작해서 암태면으로 다리가 이어졌던 거야.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섬들이었던 자은면, 팔금면, 안좌면까지 그러니까 섬 네 개가 이제는 차로 달려볼 수 있는 하나의 마을이 된 셈이지.

우리가 해변에 주차하고 물수제비를 겨뤘던 곳은 자은면에서도 가장 서쪽에 있는 둔장해변이란 곳이었다.

그러니까 거기 해넘이길에 만들어진 '무한의 다리'를 우리가 걸어본 것이지.

바다가 다른 날보다 더 보기 좋았다.

낮게 구름이 깔렸던 하늘이었지만 사람 기분에 영향을 미칠 만큼 위압적이지는 않았잖아.

오히려 한가해서 그 덕을 봤던 거 같다.

산이 너의 좋은 점은 천진하다는 거다.

너는 여행하는 사람이 되어 어느새 만끽하고 있더구나.

심심할 것 같은 풍경에서 너만의 재미를 찾아내 시간을 꾸며보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강이는 처음부터 싱글벙글 거리면서 하루 내내 즐거운 꿈을 꾸면서 걷는 아이 같았다.

우리는 마음씨 좋아 보이는 사진 찍어주는 할아버지한테서 추억에 남을 사진도 하나 만들었다.

너희는 그 사진이 마음에 드냐?

아빠는 집에 걸어두고 오래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너희가 다 커서 집을 떠나 있을 때에도 항상 같은 자리에서 그날을 생각나게 해 줄 것 같거든.

또 하나의 우연도 좋았다.

취미로 그림을 그린다는 아저씨 기억나지?

아빠는 명함 잘 안 받는데 좋은 인연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전시회를 하시면 꼭 찾아가서 우리도 그림 하나 사자.

강이가 아직 잘 걷지 못했고 산이가 다섯 살이나 됐었을까.

그때도 우리는 신안에 와서 많이 즐거웠었는데 이제는 옛날이야기가 되었구나.

할머니도 외할머니도 함께 구경하면서 좋아했었는데 두 분 모두 몸이 많이 불편해지셨다.

세월이 그렇게 흘러간 것을 아련하게 떠올리며 운전을 했던 거 같다.

아쉬움이 없을 수야 없지.

아빠나 엄마의 아쉬움은 너희가 커가는 모습 뒤로 저녁해처럼 펼쳐질 거라고 믿는다.

그것으로 충분하거든.

우리의 시간을 서로 꺼내어 하나의 소중한 것을 세공시킨 기분이다.

마치 판타지 영화에 나오는 신비의 반지들이 모여 거대한 힘이 되는 스토리처럼 말이다.

우리는 앞으로도 서로를 위해서 작은 것들을 나누기로 하자.

작지만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것이야말로 인생을 빛나게 하는 최고의 선물일 될 거니까.

오케이?

오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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