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 살, 등신 꽃 / 박제영

시의,

by 강물처럼

쉰 살, 등신 꽃/ 박제영


그래 졌다, 세상에 지고

그래 졌다, 처자식에 지고

평생을 지고, 지면서도 웃고 있는

바보 같은 꽃

꽃잎이란 꽃잎, 다 지고

꽃대마저 지고 있는데

졌다 내가 졌다, 웃고 있는

지지리도 물러 터진 꽃

어떤 식물도감에도 그 이름 없지만

천지사방 지천으로 지고 있는

졌다 내가 졌다, 웃고 있는

바보 천치 같은 꽃, 꽃

지는 꽃

지고도 웃는, 당신

등신 꽃



배롱나무 가지 끝에 뭉텅뭉텅 흰 꽃들이 한창이다.

시절은 옮겨가더라도 피울 꽃은 피워놓고 지는 것들에게는 눈길이라도 한 번 주고 가는 것인지 영 모르겠다.

꽃창포가 시들 무렵에도 그 길가에는 나만 혼자 서성거렸었다.

간간이 오가다 마주친 나이 드신 비구니 스님이 꽃, 이쁘다, 너, 이쁘다 바라만 볼뿐 아무 말도 없었다.

사랑받는 여인의 보랏빛 순脣이 피어나듯이 꽃은 부끄럽고 다정하면서도 슬픈 연애로 끝나는 애련한 감이 돈다.

꽃은 꽃이어야 한다.

꽃의 일생도 꽃이어야 하고 꽃이 다 지고 흐트러져서도 꽃으로 지고 멀어져야 한다.

꽃은 지고도 다 지지 않고 다시 꽃이어야 한다.

그것이 꽃이다.

그러니 꽃이라 나는 너를 부르는 것 아니겠는가.

꽃은 내가 지더라도 너는 피어서 다시 꼭 피어서 꽃이라 노래도 짓고 훌쩍 바람에 실려라.

쉰마흔다섯 살, 아니

마흔일곱여덟 오십 살.

대충 살았어도 그만큼 살아본 나이가 꽃 하나 피우지 못했다.

바보 같았으면 차라리 바보였으면 땅 아래에 잔뿌리 내리고 기어서라도 피어나는 꽃이었을 것이.

어정쩡해서, 긁적긁적 보낸 세월이 하 수상하여 하품이라도 좋으니까 눈물 좀 감추어야겠다.

등신 꽃이라 부를꺼나.

그러고 서서히 가볼까나.

저기 끝을 돌아서 고개를 넘으면 금방일 것을 여기 이렇게 그늘도 없는 곳에서 나는 서 있는 것인가.

꽃이다.

그저 꽃이다.

나는 잘 져서 꽃이고 너는 잘 피어서 꽃이다.

그래 그렇다. 그래 그것이 좋다. 그래,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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