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킬로 걸을 건데?"
지리산 둘레길 3코스는 20킬로미터가 조금 넘습니다.
그 길을 걸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아이들이 지금보다 어려서 두 번에 나눠서 걸었습니다.
사람은 좀 웃긴 구석이 있습니다.
전체로 기억합니다. 전부 다 기억하지 못하면서 완성된 형태로 간직합니다.
좋았다, 힘들었다, 행복했다, 아니면 불행했다. 이런 식으로 결론이 납니다.
말하자면 한 발 뗄 때마다 느꼈을 수많은 감정들은 다 어디 가고 뭉뚱그려 하나의 상 像을 세웁니다.
제가 걷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 각각의 점들에 그나마 가장 충만한 활동이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자주 멈추고 멀뚱멀뚱 천장을 바라보듯이 멀리 하늘을 내다보는 일에 매력을 느낍니다.
그때마다 주변에 이야깃거리가 있어서 심심함이 길 위에서 팔짱을 끼고 삐죽입니다.
조릿대를 보면서 꽃이 피는 것을 보기도 힘들고 꽃이 피면 모죽 母竹이 말라죽는다거나 왕대가 보이면 죽순이 좋다면서 맹종이란 사람 이야기를 꺼내 ´맹종죽´ 그러면서 아는 체를 또 합니다.
이제 보니 내 심심함이 저를 길들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너도 떠들고 싶겠지, 싶은 눈으로 그러거나 말거나 잘 기다려줬다가 또 동행해 줍니다.
좋은 짝입니다.
방금도 잠시 딴눈을 팔았는데 대체로 이런 식입니다.
아이들은 그 20이란 숫자로 기억합니다. 저희들이 20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걸었다 이겁니다.
아마 세월이 더 지나면 이틀에 걸었던 것도 아예 잊고서, 아빠가 그때 심했지! 그러면서 둘이 맞장구를 칠지도 모릅니다.
뭐, 그런 것까지 미리 서운해하지는 않습니다.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그 뒤로 아이들이 나름 대범해졌다는 것입니다.
우선 어디를 가자고 그러면 인터넷으로 거리와 강도를 검색합니다. 거리가 10킬로미터 이쪽저쪽이면 대충 수긍하는 분위기입니다. 오르막이 얼마나 되고 차편은 어떤지 그래서 물이 얼마만큼 있어야 하겠는지 따지는 것이 저는 보기 좋습니다.
나이 많은 부모라서 갖는 노파심일 것입니다.
나는 너희와 오래 걷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내가 없더라도 잘 걷고 다녀라.
그런 마음이 저한테 없다고는 말 못 할 것 같습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 마태오 18:22
용서야말로 습관이며 연습 아닌가 싶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을 이리 놓아보고 저리 놓아봅니다.
인테리어는 거실이나 식당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안에 필요한 것을 알겠습니다.
요즘은 또 미니멀 라이프라고도 그러던데 마음 따라가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일곱 번도 힘든데 일흔일곱 번이라면 사람이 까무러치고 맙니다.
어느 날 뜬금없이 20킬로미터를 걷자고 나섰다가는 사고가 납니다. 사고가 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합니다.
물속에서 열심히 튕겨봤던 발길질, 자맥질이 나를 강으로, 바다로 이끌어 줍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돈은 ´데나리온´입니다.
´드라크마´라는 돈도 간혹 나옵니다. 그러면서 탈란트라는 말도 자주 듣게 됩니다.
누군가 앞에 서서 사람들은 저마다 탈렌트를 받았다고 그러면 그때는 또 재능 같은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간단히 1 데나리온이 로마 시대에 노동자들이나 군인들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헬라에서나 로마에서 하루 품으로 1 드라크마, 또는 1 데나리온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1 탈란트는 6,000 드라크마에 해당한다고 하니 부자는 얼마나 많은 빚을 그 종에게 탕감해 준 것입니까.
100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에게 달려가 따지는 그 종을 나에게서 봅니다.
정말 그대로입니다.
미니멀 라이프는커녕 사채업을 해보면 어떨까 싶을 정도입니다.
걸어야 할 곳은 많은데 자꾸 길을 없애는 느낌입니다.
내 머릿속의 지우개를 그런 식으로 사용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지워야 할 것을 지우면 깨끗해집니다.
용서라는 말, 사람이 그 앞에 서 있는 것이 꼭 길을 두고 망설이는 것 같습니다.
오늘도 좋은 날이기를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