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 피었습니다.
찬비가 쏟아지던 새벽은 거짓말 같았습니다.
아이들은 비가 온지도 몰랐고 저 혼자만 ´어쩌나´ 싶었던 것이 호젓하게 마시는 커피처럼 좋았습니다.
밝고 맑아진 하늘을 배경으로 화사한 꽃들이, 비바람에도 떨어지지 않은 꽃들이 찬찬했습니다.
그렇게 환하게 있으니까 보기 좋았습니다.
이어령 선생의 『마지막 강의』를 펼쳤습니다.
꽃이 피면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을 떠났고 어떤 사람은 어디에 사는지도 잊었습니다. 지난날 나를 도왔던 사람들, 내가 알거나 나를 아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읽습니다. 꽃이 피어야 할 이유입니다.
어제 아침 묵상은 특별했습니다.
입을 헹구고 물을 마시고 자리에 앉은 것이 4시 15분, 6시 반까지 열 줄을 다 쓰지 못하고 까마득히 앉아있었습니다.
그 사이에 빗소리가 잦아들었고 컴퓨터 커서만 깜박이고 있었습니다.
7시에는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은데 빈손이었습니다.
불안했지만 불만은 없었습니다. 묵상이 써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쓰지 못하는 것인 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내일도 그럴 것 같아서 불안했던 것입니다.
스무 살 적에 ´축소지향의 일본인´은 하나의 문이었으며 동시에 커다란 벽이었습니다.
책이 스승이고 학교인 것을 처음 알게 해 준 책이었습니다.
지진같이 흔들렸던 동공 瞳孔, 촌티가 났지만 가슴은 더웠습니다. 지금도 비교 문학이란 말을 들으면 젊었을 적 다 쓰지 못한 내 페이지가 떠오릅니다. 조금 덜 슬펐을 것을, 조금 더 무정할 것을, 조금만 더 피어볼 것을.
그때도 그렇게 흔드시더니, 작가는 자기 글을 써야지, 다른 사람의 말을 옮겨 적는 사람이 아니라고 일갈하십니다.
비가 내리기 전날 밑줄 그었던 그 말이 내내 남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작가가 되고 싶은 것이냐고 씁쓸한 웃음도 지었습니다. 하지만 그 말씀은 정확했습니다.
쓸 말이 사라졌으니까요. 아니, 쓸 수 없었으니까요.
지금 저는 속으로 오천이라는 숫자를 셉니다. 오천 개가 되면 뭐라도 저절로 될 거라고 믿는 것 같습니다.
4,783. 이 묵상에 아멘이라고 적으면 사천칠백여든넷이 됩니다.
그것이 내 발목을 잡는 숫자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면서도 아침마다 감격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아니라 숫자를 보는 것입니다.
작취미성입니다. 술이 깨지 않아서 무엇인지 분간도 못하며 쓰는 사람이 바로 접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줄 아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몰라야 하는데, 모르고도 알아야 하는데 알면서도 모르고 사는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만발한 벚나무 아래 잠시 차를 세웠습니다.
꼬마 아이들이 감탄사 연발입니다. 아이들은 아무 데서나 경쟁합니다. 그리고 깔깔거립니다.
벚꽃이 꽉 차게 폈다고 떠드는 남자아이에게는 흐드러진다는 말을,
복슬복슬 거리는 느낌이 너무 좋다는 여자아이에게 탐스럽다는 말을 일러줬습니다.
처음 들어보는 말이라며 신기해하는 것이 귀여워서 소담스럽다는 말을 쓰는 사람을 올봄에는 찾아보길 권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찾아야 할 말도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 요한 10:38
글을 잘 쓰기 위한 묵상이 아니라 묵상이 먼저입니다. 양질의 교육을 찾아다니지만 공연한 수고가 될 수도 있습니다. 좋은 학교, 좋은 학원은 엄마한테 있고 아빠한테 있다는 것을 압니다. 아이들은 가족에게서 그리고 친구에게서 아주 많은 것들을 쏙쏙 받아먹고 자랍니다. 자세가 좋아야 홈런이 나옵니다. 자세는 꽃을 키우는 봄 같은 것입니다.
이어령 선생님의 때늦은 명복을 봄날에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