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339

아침에,

by 강물처럼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야은 길재의 옛 시가 꼭 들어맞았습니다.


그리고 기억은 다 전달되지 못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인제라는 이정표가 보이고 원통에 들어서면서부터 내 감각은 평소와 다른 박자로 뛰었습니다. 반가웠습니다. 4년쯤 됐나. 그때 군대 가는 아이를 데리고 여기를 둘러봤던 감격과는 또 다른 기분이 들었습니다. 벌써 그 아이가 제대를 한 지도 꽤 시간이 흘렀습니다.




길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걸어본 길과 그렇지 않은 길. 당연히 걸어본 길이 턱없이 적습니다. 그런데 걸어본 길은 세월이 아무리 흘렀어도 발바닥이 알아봅니다. 아버지와 손바닥을 마주 대보는 아이처럼 길이 발에 척 들어맞습니다. 신났던 것은 아닌데 목소리가 들떴습니다. 여기는 다 걸었던 데야, 여기 왼쪽에 사격장, 그리고 한참을 달려서 12사단 신병 교육대대 앞에도 갔습니다. 건물은 새로워졌지만 그만큼 왜소해졌습니다. 왜 기억 속에서 세월을 먹은 것들은 무엇이든 작아져 있는지.




산이와 강이가 무슨 놀라움이나 감격이 있겠습니까. 아이들은 내 이야기는 한쪽으로 듣고 여전히 핸드폰에 주의를 뺏기고 있었습니다. 사실이란 것도 때가 지나면 김이 빠지고 맙니다. 내 스무 살 적 이야기는 그때 친구들이나 만나야 밥이 되고 국이 되어 끓을 것입니다. 그것이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던 그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4대대가 옮겨 간 자리는 굳게 문이 닫혀 있었고 선점 중대에 오르던 길은 그새 포장되어 산악자전거용 도로가 되었습니다. 30년, 한때는 진리 같았던 이데올로기가 - 아침마다 구보 중에 군가를 부르며 뛰어오르던 비탈길이 - 마치 스포츠 용품을 걸어놓은 너른 매장으로 바뀐 것 같았습니다. 여기에서 저 산들을 봤었는데 다 쓰러져가는 초소가 덩그렇게 남아있었습니다. 내가 저 안에서 새벽 보초를 섰었는데.




휴전선과 땅굴을 보여주려 했지만 마침 공사 중이어서 접근이 불가했습니다. 여기가 거기다. 무엇인가 진실을 토로하는 듯한 비장한 내 목소리가 희극이 되고 말았습니다. 정말이지, 서로 살아온 세상이 달라도 너무 달라서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박하나 계피 맛은 민트 초코 하고 전혀 다른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적어도 여기에서 보냈던 내 한 시절이 생뚱맞게 보이는 그림으로 보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조금 삐졌습니다.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




한 사람이 살아온 스토리는 이렇듯 영과 육이 되는 것 같습니다.


영을 공유하는 사람들, 그것은 공간의 개념을 넘어선 사이일 것입니다. 내가 어제 보고 싶어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했습니다. 거기 남은 것들은 내게 남은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스물두 살의 나. 겁먹고 두려워하던 나를 위로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괜찮다. 내 말은 믿을 수 있지 않느냐. 나는 너다. 그런 말을 해주고 싶었습니다.




인제에 들어오면서 자작나무 숲으로 갔습니다.


한참을 고생해서 올랐습니다. 물도 없이 갔다가 길이 생각보다 멀어서 고생 좀 했습니다.


그래도 그 다닥다닥한 살림들, 자작나무들이 360도 사방으로 둘러싼 곳에서 아이처럼 좋았습니다. 보고 싶었던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나는 네가 보고 싶었구나. 그것을 여기 와서 알았다. 혼자였으면 하루 종일 거기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자작나무를 한 그루 심기로 했습니다.


다시 스무 살이 되어보기로 합니다. 그 나무를 바라볼 때마다 인제를 떠올리고 행군하던 길들을 그리고 눈 내리던 날들도 다 거기에 달아 놓을까 합니다. 사람들, 지금도 꿈속에 나오는 사람들은 떠나보내고 다시 쓰는 일기장처럼 하얗게 쓰는 이야기를 기대합니다. 그 마음을 가지려고 여기 하늘 내린 인제에 들렀던가 봅니다.




오늘 아침, 동해 바다가 보이는 설악산에는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피곤한 아내와 나는 빗소리마저 정겨운데 우리보다 훨씬 ´젊은´ 산이와 강이는 이 비가 반갑지 않아 보입니다.


그것이 인생인 듯싶습니다.




먼 곳에서 안부 전합니다.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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