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그러운 자연은 좋지만 벌레는 딱 질색이야.
흔히 듣는 말입니다.
그리고 흔히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저 또한 산에 가서 음악을 듣고 기도를 하면서 침묵하기도 하지만 벌레를 반기지는 않습니다.
날파리도 날아다니기 시작했고 여기서 더 더워지면 스프레이로 된 벌레 퇴치제를 가방에 넣어 다니기도 합니다.
학생들의 문장을 살필 때 두 단계를 거칩니다.
먼저 문법적으로 올바른가 묻고 그다음 의미가 통하는지 한 번 더 묻습니다.
문법이나 구조가 한 그루 한 그루 나무의 역할을 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나무들이 곧고 믿음직스러운 숲은 아무래도 설렘이 있습니다. 공기를 깊이 들어 마실 준비가 내 몸에서 착착 이루어집니다. 분명히 요즘 학생들은 예전에 비해 우수한 자질을 보유한 재목들입니다. 일단 문법적으로 해박해서 문장 그 자체가 감탄할 만합니다. 그러나 정작 단어 사용에서 실수를 많이 저지릅니다. 도로나 다리를 잘 놓기는 하는데 그 지방의 풍토나 문화, 기후를 고려한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과 같습니다. 모든 다리를 똑같은 방식으로 건설하고 있는 우리 아이들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나무는 좋고 튼튼한데 숲을 이루지 못하고 홀로 자라고 있습니다. 숲이 되지 못한 나무들은 항변합니다. 숲이 무엇이냐? 꼭 숲이 되어야 하냐? 우리에게 그런 기회가 있기는 했었냐?
무엇보다도 - 이것은 심각한 문제인데 - 똑같은 나무가 되려고 합니다. 편백나무가 제아무리 좋아도 그것으로만 숲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편백나무에게도 그늘이 있습니다. 모든 꽃이 한날한시에 피고 진다면 그보다 삭막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부자연이야말로 흉측스러운 그로테스크 grotesque가 됩니다. 단어, 한 글자의 말들이 차지하고 있는 영역을 탐험할 기회를 갖지 못하면 허술하고 밋밋한 다리를 짓거나 인공 섬이라든지 인공 숲, 더 나아가 인공 지능에 빠지게 되는 듯합니다. 직접 체험하자니 시간과 수고가 들고 그래서 중요한 것들, 뼈대가 되는 것들만 서로 가르치고 배우면서 어영부영 청춘을 다 보내고 있습니다. 편지를 쓰던 젊은 연인들은 어디로 다 사라지고,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그러면서 주머니 속 코인을 만지작거릴 뿐입니다.
자연은 싱그럽고 벌레 없이 자연은 없습니다.
자연은 딱 질색이야,라고 누가 그러면 이상하게 들릴 것입니다.
그래도 싫은 것은 싫은 거라면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물을 페트병에 담아 팔고 마시는 일이 더 자연스러워졌으니까요. 다른 자연을 우리는 만들어 내고 찾아낼 것입니다. 그 자연이 우리가 알던 자연과 과연 얼마나 같은 것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 요한 15:16
과수원을 보면 우리 살아가는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해충을 잡으려면 농약을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가 벌과 나비마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붓을 들고 다니며 꽃가루를 묻혀 일일이 ´가루받이´를 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워졌습니다.
바람에, 빗물에 흘러가 암술머리에 옮겨지는 꽃가루도 있습니다. 꽃은 꽃대로 열심히 열매를 맺고자 합니다. 때로는 실컷 몸을 가볍게 만들어 공중에 띄우고 때로는 빛깔과 향기로 자신을 날려 보냅니다. 먼 데에도 가고 가까운 곳에도 떨어져 꽃밭을 이루려고 합니다. 사람은 자꾸 손을 대려 하고 하느님은 지켜보십니다. 아이를 키우는 것도 그와 같을 것 같습니다.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열리는 것과 사람이 열매를 맺는 일이 얼마나 어떻게 다른 일일까 생각하는 아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