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이 6학년 상담

아빠가 쓰는,

by 강물처럼


순전히 나는 전해 듣는다.

산이가 오산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하던 날은 아마 내 남은 날 동안에는 잊히지 않을 것이다.

빨간 점퍼가 그날처럼 어울렸던 적이 있을까. 양쪽 귀가 조그맣게 드러나고 뒤에서 봐도 단정해 보이는 머리 모양이었다. 처음 간 학교에서 비록 작은 시골 학교지만 6학년까지 다 모인 강당에서, 선생님들 아빠, 엄마들이 다들 지켜보는 곳에서 산이는 입학생 선서를 했다. 흔들리지 않고 또박또박, 그리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쟤는 누구야.


그러니까 산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날 그리고 그 뒤에 딱 한 번 담임 선생님 면담에 다녀온 것 말고는 모두 애들 엄마한테 전해 듣는 이야기다. 학교에 가기 싫은 것은 아니다. 1학년 1학기 상담, 그러니까 첫 상담하는 날 있었던 장면들이 고스란히 떠오른다. 빛이 환한 교실에서 젊은 여선생님과 잠시 동안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슴이 부푸는 것을 느꼈다. 자식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그리고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여기는 사람에게서 찬찬히 들으면서 내가 아는 아이의 이야기를 덧붙일 때 내 자신도 밝아지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런지 그때 그 교실이 오래 인상에 남는다. 그 뒤로 나는 모든 상담을 애들 엄마한테 자연스럽게 넘겼다. 아마 애들 엄마는 흔히들 생각하듯이 남자들은 그런 거 성가시고 불편해하니까 자기에게 미뤘을 거라고 지금도 믿고 있을 것이다. 사실은 그 황홀한 순간을 건네준 것이다. 앞으로 듣게 될 기분 좋은 이야기들을 나 대신 들어보라는 내 뜻이 거기 있었다. 매년 아이들 상담을 다녀온 뒤에 쓴 일기들은 하나같이 즐거운 내용들이다. 이번에는 강이네 담임선생님하고 전화로 상담을 했다고 그랬다.

친구가 지난여름에 사준 영동 와인이 맛있었다며 기대에 찬 눈짓을 걸어온다. 술을 마실 만큼 속이 건강한 편이 아니어서 선물로 받은 와인이 몇 개 쌓였던 것이다. 어제는 스페인 jumila에서 온 Juan Gil 후앙 길을 잔에 따랐다. 살림이 부유하지 않아도 와인이 좋은 점은 공감 능력을 확장시켜 우아한 영혼이 되게 해준다는 것, 잠시 피아노 선율 위에 선 사람처럼 흔들면서 세상을 마주한다. 내 앞에 앉은 사람은 얼굴이 벙글었다. 잔잔한 것들이 호수의 표면같이 흐른다. 피우지 마라, 꽃은 느즈막에 보기로 하자며 나는 재촉한다. 그래, 그래, 어서 말해다오, 그 달콤한 속삭임을 이리 건네다오. 맑은 포도주가 병 속에서 연주하는 우아한 유령 Graceful Ghost Rag. 나를 이 궤도에서 벗어나게 하는 맛있는 한 방이 나를 맞힌다. 적중, 붉어지기를 기다리며 나는 강이의 학교생활을 교과서처럼 펼쳐 읽는다. 먼저 설명을 잘 듣기로 한다.

선생님이 그러는데 강이는 행복한 아이 같다고.

얼마나 좋았던 말이던가. 나는 그 말을 어제 처음 들었던 것이 아니다. 몇 해 전에도 그보다 더 오래전에도 지나가다가 인사차 건네는 말속에서도,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얼굴 모르는 이웃집 아주머니한테서도 그랬었다. 그 집 아이를 보면 행복해져요. 내 행복을 허락하는 너를 그때 알아볼 수 있었다는 고백을 받아다오. 여자 엄마가 여자 딸을 사랑하는 빛은 저렇게 올라오는구나, 싶었다.

선생님 팔짱을 끼고 이야기를 하면서 쫑알쫑알 잘도 떠든대요. 그래, 너는 그럴 수 있어서 좋다. 사람이 사람을 즐겨 반기니 마음이야 꽃밭에서 뛰노는 사슴이겠구나. 내 선생님들을 탓하기 전에 나는 나를 원망하는 습관을 배웠다. 선생님은 너무나 높고 먼 사람들, 내 어릴 적 아침은 세수를 하면서 이름을 지우느라 다 써버렸다. 누가 모르는 이름을 갖고 싶었다. 어디서든 선생님이 보이면 길을 돌아서 갔다. 기억나는 이야기는 하나도 없이 표정들만 잘 떠오른다. 웃는, 나는 싫은데 웃는 얼굴들로만 남은 사람들. 시창이를 왜 그렇게 때렸을까. 정말 양쪽 뺨이 빨갛게 달아올랐던 날에 우리는 어디로 날아가 버렸다. 양복을 입고 안경을 쓰고 그리고 손목시계를 벗고 오른손을 높이 쳐든.

그래서 나는 귀를 열고 마음을 열고 오랜만에 공중에서 내려와 강이네 교실을 지나고 학교 가는 길을 지나고 강이 친구들을 지나서 내 어릴 적 나를 그 곁에 동행시킨다. 학교는 이런 거야. 학교야. 선생님이야.

사회를 어려워하는데 강이는 어휘가 좋은 편이라 따로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거 같다고. 그랬단다. 나는 지금도 사회가 어려운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래서 괜찮아. 다 괜찮아.

강이야, 늘 그때를 너는 갖고 살아라. 처음 이야기책을 한 줄 한 줄 받아 적던 그 작은 손가락들을 갖고 살아라. 모르고서 적는 것이 더 많았던 그때가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는구나. 심근성, 나는 아마도 천근성 뿌리였던가. 우리는 뿌리가 하는 역할에 따라 맛이 다른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을 네 나이 스물쯤에는 일러주어도 좋을까. 나를 행복하게 하는 그래서 그러니까 더 고마운 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