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가을 같다

아메리카노는 여기 어디쯤에서

by 강물처럼


이런 것도 마케팅이 되나?

그렇다면 아주 진귀한 마케팅이다.

남도의 월출산 정상을 넘어 구정봉 너른 바위에 앉아서 아침 묵상을 광고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접수. 부산에 사는 분을 이런 곳에서 구독자로 만들다니, 전설적인 마케팅 사례담이 될지도 모릅니다.

부안 선생님은 부쩍 나이 들어 보였습니다. 코로나로 심하게 앓았다던 말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출발은 했지만 나는 곧 졸렸고 선생님은 월출산에 오른 지 30분이 되지 못해서 상태가 좋지 못하다고 하소연했습니다. 사실 집에서 출발하기 전에 마음을 먹었습니다. 어쩌면 건강한 모습으로 월출산을 다시 찾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막연한 불안감을 바로잡았습니다. 오늘은 선생님 입장에서 움직이기로. 그렇게 마음먹었습니다. 다시 그 길로 돌아 내려와도 괜찮을 거 같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운이 좋았습니다.

선생님은 천천히 쉬운 길로 올랐고 만약 좋지 않으면 차로 돌아가 쉬기로 했습니다. 나는 2년 만에 오는 곳이라 구름다리 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힘든 바위들이 그대로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이제 왔냐며 반기는 듯했습니다. 어디, 얼마나 좋아졌나? 얼마쯤 기운이 떨어졌나? 돌들이 나를 짚어보는 듯했습니다. 나는 그렇게 힘을 들였고 선생님도 아마 그 이상으로 애써서 올랐을 것입니다. 시골에서 뼈가 굵은 선생님 아닌가. 손바닥에 흙이며 돌, 나무 넝쿨이 칭칭 감겨 살아왔지 않는가. 죽을 고비를 지나온 사람이 아니던가. 어느 쪽으로 가든 부안 선생님이 가는 쪽은 평화롭다고 믿습니다. 쓸쓸할지라도.

정상에는 마당이 펼쳐져 있습니다. 월출산은 정상에 많은 사람들을 앉힐 자리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월출산의 너른 품이 간직하고 있는 여러 가지 매력 중에 하나입니다. 거기에서 추수가 끝난 영암의 벌판과 바다로 흘러드는 영산강 줄기를 내려다보는 망중한은 가을의 필수품입니다. 그 풍경을 두고 도시락을 펼쳐 밥술을 떴습니다. 천황봉에서 누구나 황제가 됩니다. 다른 날과 다른 어제, 선생님 옆으로 두 걸음쯤 떨어진 곳에 두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농담인 줄 몰라서 진짜 친구분을 도중에 만난 줄만 알았습니다. 낯선 사람을 바로 쳐다보는 일도 쉬운 게 아니어서 대충 인사를 나누었고. 그런던 중에 서로 나누는 이야기를 듣다가 오늘 만난 '친구'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산에 오르는 도중에 여기 처음 온 두 사람이 선생님에게 길을 물었고 그 길부터 동행하며 올라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천황봉에서 어느 쪽으로 내려가야 하기에, 질문을 고쳐 말해줬습니다. 빨리 그리고 편하게 내려가고 싶은지 멀리 걸어도 오래 기억될 길로 걸어보고 싶은지. 여기에서 이쪽으로 도갑사까지 닿는 길은 30년이 지나도 또 걷고 싶던데요. 그 한마디로 서울과 부산에서 온 친구라던 두 분이 우리와 동행했습니다. 마음을 알겠습니다. 여기까지 찾아왔던 그 마음은 이 길에서 모르긴 몰라도 상량식이라도 치를지 모릅니다. 자그맣더라도 마음에 의지가 되는 대들보를 올리는 그 여정을 권했습니다. 누구라도 그런 말 들으면 걸을 수밖에 없다는 말, 게처럼 계단을 내렸습니다. 옆으로 옆으로 내디뎠지만 앞으로 가는 우리는 정말 친구 같았습니다. 부안 선생님은 산에 들어서면 행복하다는 분이십니다. 내가 여태 좋은 말벗은 되지 못했던 것이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어쩌면 벌써 돌아가 차에서 혼자 쉬고 있었을 것을 오르다 만난 두 분 덕분에 말을 끊지 못하고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들리는 듯 마는 듯 앞서가는 나는 암컷이었던가 수컷이었던가. 가을에 맛있는 게는, 그 생각이었습니다. 바위들이 무성하게 자라는 곳, 곡예하는 곳, 바다였던 산, 나는 그 바다에 유영하는 게, 하늘로 오르는 길에서 시절, 시절, 모두 시절 인연이라고 풍선을 띄웠습니다.

혼자 올 때는 갈대밭에서 들었던 노래를 구정봉 큰 바위에 앉아 들었습니다. 아메리카노를 나눠 마시며 천황봉을 돌아봤습니다. 아까는 저기 있었는데, 세월이었을까요. 시간이었을까요. 우리는 무엇을 타고 여기 내렸습니다. '그대는 어디에' 그 노래는 어쩌다가 들었는지 잊었습니다. 잊었지만 이쯤 오면 저절로 손이 갑니다. 눈은 나른하게 하품하는데 손이 찾고 발이 평평한 곳을 찾아 움직입니다. 조용히 듣고 싶어 합니다. 내 수고로운 손과 발에게 무엇을 따라주어야 할는지요. 폐부로 호흡하는 시월, 나는 죽으면 여기에 오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살아서, 오늘도 잘 다녔으니까요. 황동규 시인을 만날 수 있었다면 좋았겠구나, 그 생각했습니다.


시월에 읽는 황동규 시인의 시, '시월'에 작대기를 받쳐놓고 게으른 하품을 연신 쏟아봅니다. 나른해라, 시월 속의 나는 씨가 됩니다. 시가 익는 씨여.

¶ 1

내 사랑하리 시월의 강물을

석양이 짙어가는 푸른 모래톱

지난날 가졌던 슬픈 여정들을, 아득한 기대를

이제는 홀로 남아 따뜻이 기다리리

2

지난 이야기를 해서 무엇 하리

두견이 우는 숲 새를 건너서

낮은 돌담에 흐르는 달빛 속에

울리던 목금소리 목금소리 목금소리

나는 여기에서 멈추고 내려갑니다. 시를 아껴야겠습니다. 볕을 감추고 아니 나눠서 따로 넣어두고 길을 낙엽으로 덮어놓습니다. 목을 있는 대로 다 축이지 않을 것입니다. 무릎을 아끼듯이 살살 녹아갑니다. 나는 가을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아 울 뻔했습니다. 혹시 울었다면 웃어서 잊으세요. 옛날에도 비가 오는 날이었습니다. 도갑사에 마당은 질척거렸습니다. 거기 발자국, 내 발자국 위로 버스가 지나갔습니다. 다시 얼마 못 가서 시를 꺼내놓고 추억을 떠올립니다. 가을이 가을 같습니다.

3

며칠 내 바람이 싸늘히 불고

오늘은 안개 속에 찬비가 뿌렸다

가을비 소리에 온 마음 끌림은

잊고 싶은 약속을 못다 한 탓이리

4

아늬,

석등 곁에

밤 물소리,

누이야 무엇 하나

밀물 지는 고물에서

눈을 감듯이

바람은 사면에서 빈 가지를

하나 남은 사랑처럼 흔들고 있다

아늬,

석등 곁에

밤 물소리

무엇을 보셨나요. 나는 월출산의 속을 걷자고 그랬었는데 그 속은 어떠셨나요. 거기에 심장은 있었으며 피는 흐르던가요. 감정은 어느 색깔이던가요. 감각은 어느 줄기에서 자라는 가지던가요. 돌이 부서져 흙이 되는 속이 거기에서 잘 보이던가요. 아니면 구름만 휘황하였던가요. 나는 숨죽여 조릿대를 건드려 봤습니다. 너는 바람이 좋으냐, 볕이 좋으냐 물었습니다. 종소리가 좋으냐 별이 흐르는 소리가 좋으냐, 사람이 좋더냐 하늘이 낫더냐. 물었습니다. 우물이 한 번 보고 싶다는 그 말은 소원이었을까요, 꿈이었을까요. 과연 등불은 무엇인지 알고는 있었을까요.

5

낡은 단청 밖으로 바람이 이는 가을날, 잔잔히 다가오는 저녁 어스름

며칠 내 낙엽이 내리고 혹 싸늘히 비가 뿌려와서... 절 뒷울 안에 서서 마을을 내려다보면 낙엽 지는 느릅나무며 우물이며 초가집이며 그리고 방금 켜지기 시작한 등불들이 어스름 속에서 알 수 없는 어느 하나에로 합쳐짐을 나는 본다.

6.

창 밖에 가득히 낙엽이 내리는 저녁

나는 끊임없이 불빛이 그리웠다

바람은 조금도 불지를 않고 등불들은 다만 그 숱한 향수와 같은 것에 싸여가고 주위는 자주 어두워갔다

이제 나도 한 잎으로 낙엽으로 좀 더 낮은 곳으로, 내리고 싶다

다 내려왔습니다. 나도 그러고 싶다고 말할까 머뭇거렸습니다. 내려와서도 내리고 싶다니, 조금 웃어도 좋을 것입니다. 부산으로 서울로 돌아가시겠지요. 부안 선생님은 부안으로 나는 어디에 있습니다. 커피도 맛있었고 사과도 맛있었습니다. 걸음은 기름졌습니다. 비옥했습니다. 나는 살쪘습니다. 암만 생각해도 좋은 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