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27, 목요일
어제 X 표 이야기는 어떠셨나요. 마침 숨이 가빠지기 시작할 무렵에 휴대폰 메시지가 하나 울렸습니다.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자랑은 아닙니다. 무엇인가 통한다는 느낌은 그것이 무엇이든 살랑거리게 해줍니다. 포플러 가지에 촘촘한 이파리들이 반짝거리던 거리는 세월이 지나도 나를 젊게 해줍니다. 문득 거기에 가보고 싶어집니다.
¶ 어제 선생님 프로필을 보고 살짝 당황했어요. ㅎㅎ
대환이가 문제집 채점하면서 틀린 게 너무 많아서 스트레스 받는다고 한 게 생각나서 이거 보면 아이가 상처받지 않을까... 했거든요. 대환이에게 조심스럽게 선생님이 올린 거 혹시 봤어?라고 살짝 물어보니 본인이 허락했다며 멋쩍게 웃는 걸 보고 아이가 많이 단단해진 거 같아 안심이 되었어요. ^^
앞으로 문제집에 비 안 오게 더 열심히 해보겠다는 말에 같이 웃었네요~ ㅎㅎ
대환이가 점점 커나갈 모습이 기대됩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어머니.
그렇게 다시 전하고 싶었지만 막 오르막이 시작된 지점이라 내 발걸음에 집중했습니다. 고마운 생각과 다는 아니더라도 소통이란 것이 어떠해야 하는지 묽게 번져왔습니다. 새벽에 다시 적어봅니다.
아닙니다, 어머니. 대환이는 단단해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 부드러워지고 있습니다. 그 말이 하고 싶었습니다.
사실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들도 그렇고 커다란 고등학생들도 X 표 관리가 서툽니다. 감정이 거기 함몰되는 것을 목격합니다. 감추고 숨기는 일은 더 많습니다. 자기 잘못인 양 얼굴을 붉힙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다른 데 있습니다. 인정하지 않습니다. 틀릴 수 있지, 라는 말이 아이들에 따라 제각각 해석됩니다. 틀릴 수 있으니까 잘 고쳐 쓰는 아이가 있으면 틀릴 수 있으니까 그대로 덮어버리는 아이도 있습니다. 내가 대환이가 멋지다고 했던 것은 거기입니다.
아이는 자기 X 표를 열등감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내가 가지지 못한 덕목이었습니다. 내가 배우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 장면을 오래 기억할게, 그랬던 것입니다.
멀리 다녀왔습니다.
다른 날도 아니고 어제 다녀오고 싶었습니다. 3시 반에 일어나 아침 기도를 적고 배낭을 챙겼습니다. 내가 아는 외롭고 높고 쓸쓸한 ´부안 선생님´을 찾아가 남쪽 끝으로 달렸습니다. 수업도 사정이 있다며 생략했습니다. 다른 날 빠지지 않고 챙길 것을 약속했습니다. 글쎄 선생님도 병원 예약을 뒤로 미루시고 마당에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언젠가부터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얼싸안는 것이 자연스러워졌습니다. 그동안 앓으셨다더니 얼굴이 수척했습니다.
91년부터 다니기 시작한 그 산 앞에 서면 그야말로 긴 연애 소설을 펼친 기분이며 하루가 다 걸리는 고해성사가 막 시작한 듯한 분위기에 빠집니다. 어제도 그랬습니다.
´올해도 왔구나. 여기까지 올라왔구나. 고맙다. ´
가장 숨이 찬 오르막에서 한 번, 무릎이 제일 힘들어했던 내리막에서 한 번, 감사했습니다. 산에도 계급장이 있다면 저는 그 계급입니다. 데크로 만든 계단이 생기기 전에 입대한 사람. 그래서 맨살에 닿는 느낌을 월출산과 공유하는 사람이라는 계급. 저는 그 계급이 좋습니다. 정상에 가면 다들 끝내준다며 바쁩니다. 그 순간 내가 여기에서 봤던 모든 사람들의 안부가 궁금해집니다. 바람이 불던 날에 눈이 내리던 날에 흐렸던 날, 하늘이 무지 파랬던 날 그 모든 날에 여기 머물던 사람들에게 안녕.
내가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말랑말랑한 X 표를 가르쳐 주는 일인 듯싶습니다. 나는 그렇게 배우지 못했지만 그래서 그렇게 살지 못했지만 찐빵 같은 X 표, 오아시스 같은 X 표가 더 좋더라며 부럽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애써 사막으로 만들지 않았으면 합니다.
어제 산길을 호젓하게 내려오면서 송명희 시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물론 ´부안 선생님´이 소개하셨습니다. 걸음을 멈추고 찾아봤습니다. 그리고 메모했습니다. 오늘이 되면 그 말부터 날려 보내고 싶었습니다.
¶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나, 송명희 시인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지니고 살아가는 분이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지니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공평하신 하나님´ 그러면 공평하신 거라며 내 몸 아픈 것이 무슨 대수냐며 넓게 웃습니다. 그 넓은 웃음이 좋아서 이렇듯 가을이면 부안 선생님을 꼬시는 것 같습니다.
잘 다녀왔습니다.
내 X 표들도 그런대로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