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루카 14:11
공식적으로 저하고 가장 오래된 나무는 ´수덕이´입니다. 요즘 나무에 대한 책을 보고 있어서 사람도 나무 같아 보입니다. 박상진의 ´나무 탐독´은 일독을 권합니다. 옛날이야기 듣는 것처럼 잔잔한 재미가 있습니다. 사람이 느긋해지는 운치가 있습니다. 자크 타상의 ´나무처럼 생각하기´는 철학적이며 분석적이고 종교적입니다. 그것은 수필처럼 편안했다가 생물 학도들의 전공서같이 어렵다가 깊은 공감을 자아내는 탄원서 같기도 합니다. 애팔래치아 산길을 다 걸으려면 500만 번 걸음을 걸어야 한다고 합니다. 2만 보만 걸어도 다리가 후들거리는데, 빌 브라이슨이 시도했던 3,520km를 따라가 볼 생각입니다. ´나를 부르는 숲´이 나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침 사람이 나무 같아 보이는 이 계절에 수덕이가 왔습니다.
전주 남 국민학교, 1학년 9반 교실에는 예순 명 넘는 아이들이 바글바글했습니다. 다른 기억은 없습니다. 수덕이가 책받침을 날렸다가 어느 여자아이가 맞았고 일순간 주위가 얼음처럼 차갑게 굳어졌던 날이 있었고, 가정 방문을 하는 선생님을 따라다니다가 둘이서 선생님을 놓치고 삼거리로 나눠지는 골목길, 전봇대 앞에서 우왕좌왕하다가 서로 집으로 돌아갔던 하루가 있습니다. 수덕이 하고 저는 ´숫자´를 공유하는 인연입니다. 공간은 달라도 같은 숫자를 마주칩니다. 수덕이는 거기까지는 모를 것입니다. 우리는 71년 생이며 내 양력 생일은 수덕이의 음력 생일이고, 중학교 1학년은 5반, 고등학교 1학년은 7반이었습니다. 그걸 눈치챘던 것은 내 나이 언제였던 거 같습니다. 우리는 같은 숫자를 지나가는 사람들이구나.
이다음은 어떤 숫자를 각자의 위치에서 마주하게 될지 흥미롭습니다.
아직 약속을 정하지 않았습니다. 수덕이는 어제저녁에 이란에서 한국에 왔습니다. 그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외교관입니다.
어릴 적 이야기들은 아라비안나이트의 천일야화처럼 풀어낼 수 있을 정도입니다. 수덕이가 결혼하는 날은 마치 우리가 장가보내는 기분이었습니다. 한옥 마을이 된 전동 성당 마당에서 우리들의 1막이 내리고 2막이 올랐습니다.
우리가 살았던 2막이 궁금하면서도 알 것 같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얼마 지나지 않으면 우리의 3막이 공연될 것입니다. 친구는 나무와 같이 세월을 잘 살아갑니다.
¶ 생과 사는 같은 속도로 서로 나아가면서 나무 안에서 공존하고 있다. 매년 나무는 지난해의 죽은 조직들을 벗어버리고 그 주변에 다른 조직들을 탄생시킨다. 프랑스의 식물학자 프랑시스 알레는 나무에 대해 "산 것은 죽은 것을 안고 있다."라고 쓰기도 했다. 소멸에 대한 영원한 승리인 것이다. 자크 타상, 나무처럼 생각하기 89p.
버스에 막 올라타던 순간이었습니다.
뇌리에 겹치는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마치 이중의 화면처럼 우리가 버스에 오르는 기억 위로 내가 모르는 젊은이들이 흐릅니다. 위계와 자본에 휘둘리는 표정이 역력합니다. 그들과 우리는 따로 움직이지만 그러면서도 서로를 견제합니다. 신경 쓰고 있습니다. 한 화면으로 보이지만 다른 화면이어서 우리는 서로 말이 없습니다. 단절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가 보입니다. 그래서 의식하고 맙니다.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영향을 받는 사이입니다. 좋은 쪽이든 그렇지 않든.
그 모습을 그대로 가져다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20년 넘게 해오고 있습니다. 수덕이는 내 앞에서 버스에 올랐고 전주 버스는 오랜만이어서 요금을 내는 와중에 몇 마디 물었습니다. 기사 아저씨가 급했던 일이 있었는지, 아니면 답답했는지 다그쳤습니다. 젊은 사람이 왜 그 모양이냐는 투였습니다. 뒤에서 듣고 있던 내가 기분이 좋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마땅한 물음에 대한 업신여김, 폭력 같았습니다. 그런데 수덕이는 말 그대로 굽신거렸습니다. 고개를 몇 번이나 숙이고 죄송합니다를 연발했습니다.
아저씨! 그러면서 따지려던 나는 그 모습에 할 말이 사라졌습니다. 그 순간이 찍혔습니다. 지워지지 않는 CCTV가 찍힌 것입니다. 나는 그 장면을 오래 간직하고 있습니다. 아마 수덕이 아들이나 딸을 만나 커피를 마시는 날에는 그 이야기가 새어 나오고 말 것입니다. 야는 너그러워서 너그러운 거야, 아니면 너그러우려고 너그러운 거야. 야는 이런 일쯤은 시시콜콜 해진 건가. 고시에도 붙었는데 이제 만사가 오케인데 그래서 이런 실랑이는 아무렇지 않은 건가. 그런데 놓칠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는 시간이 찰나입니다. 감정이나 인격의 매무새를 마름 할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되지 않는 시간을 우리는 종종 영원처럼 살 때가 있습니다. 수덕이가 아무것도 아닌 일에 한소리를 들었고 나는 그게 불쾌했으며 수덕이는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 시간은 몇 분의 몇몇몇몇몇몇 초였을까요.
그때 내게 날아온 문장이 오늘 복음 말씀입니다.
여기를 지나면 그가 생각납니다. 나무 같았으면 싶은, 수덕이라는 친구가 여기에 서 있습니다.
오늘은 말이 자꾸 빨라질 것 같습니다. 서두르지 않고 태연한 척 일을 해야 하는데 마음이란 것이 자기 마음대로입니다. 버릇을 잘못들인 제 탓입니다. 그나저나 날은 어쩌라고 이렇게 좋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