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45-1

도연초

by 강물처럼

2022, 1112, 토요일


결국 헛수고가 되고 말았다. 결국 우리 팀이 이겼다. 결국 그 남자와 결혼을 했다. 결국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는 결국 성공했다. 결국, 마침내, 드디어, 그 뒤에 어떤 말을 적을까, 아니면 어떤 말이 적힐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일본어로 된 책 중에서 가장 제목이 마음에 드는 것을 하나 고르라고 한다면 저도 ´도연초* 徒然草´를 들고 싶습니다. 승려인 요시다 겐코 吉田兼好(약 1283~1352년 경)가 지은 수필집입니다. 거기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 세상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보면 조금은 분별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도 대체로 이런 식으로 생각만 하다가 일생을 보내 버리는 것 같다.


이웃에 불이 났을 때 "잠시 기다렸다가 대피해도 괜찮겠지"라고 하겠는가. 내 한 몸을 구제하기 위하여 부끄러움도 남의 이목도 두려워하지 않고 재산도 다 버리고 도망을 갈 것이다. 목숨이란 그 사람의 좋은 시기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죽음이 찾아오는 것은 물이나 불이 덮쳐오는 것보다 빠르며 도망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때를 맞이하게 되면 나이 든 부모, 가엾은 아이들, 은혜 입은 사람들, 타인과의 정이라고 하여 일일이 버릴 수 없다고 안 버릴 수 있겠는가.




지난 목요일 아침 일찍 장례 미사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다음 날 쓴 일기의 일부입니다.




¶ 미륵산에서 여든 할아버지가 신발을 신지 않고 산에 오르는 것을 또 마주쳤다. 오늘은 말을 걸었다. 다음에 만나면 말씀 좀 해달라고 허락까지 받아놨다. 미륵산은 단풍을 보러 가는 산이 아니다. 거기는 숨 고르는 것과 근력을 위해 오르는 산이다. 그 나름의 매력을 가져야 한다. 미륵산에는 미륵산의 것이 함라산에는 함라산의 매력이 있다. 철이 좋으니까 더 먼 데로 가서 숲을 보고 오면 좋을 텐데, 그만큼 여유는 없다. 그것이 아쉬울 뿐이다.




7시 반이면 이른 시간이다. 이른 시간에 장례 미사에 참석했다. ´Hodie mihi Cras tibi, 오늘은 나 내일은 너´. 관을 덮고 있는 짙은 선홍색 천에 노랗게 장식된 글씨. 그 말이 오래 남았다. - 2022, 1111. 日記




´로마인 이야기´를 읽고 로마 가도를 따라 길을 걷는 상상을 했습니다. 그 길 옆으로 많은 무덤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 묘비에 쓰인 문장들을 읽으면서 한참 길을 걷고 싶습니다. 끝까지 유머를 잃지 않은 무덤 주인들도 간혹 만날 수 있어서 뭉클한 것이 속에서 올라오기도 한답니다. 그 길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말, 잊지 말고 살라는 말, Hodie mihi Cras tibi.




어제는 금요일이라서 쉬 더 피곤했습니다. 피곤할 때는 집중이 안 됩니다. 실수가 많아집니다. 아침에 묵상을 적기 시작한 것도 그 이유가 큽니다. 몸이 건강할 때는 저녁이 즐겁지만 몸에 힘이 없으면 아침이라도 잘 살아야 합니다. 저녁에는 그저 눕고만 싶어져서 다른 일을 못 하고 맙니다. 일을 못 하게 되는 것과 안 하게 되는 것은 그 차이가 큽니다. 일을 못 하게 되면 견디기 힘듭니다. 마음이 불편해지면 몸은 눈치를 보느라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맙니다. 작은 일이라도 그것을 맡아서 해나갈 때 사람은 보람을 갖습니다. ´노릇´이란 말과 ´그릇´이란 말이 나란히 볕을 쬐고 있는 것이 보기 좋을 때가 찾아옵니다. 제 딴에 노력해 보는 것, 나는 그것이 성스럽게 보입니다. 결국 꾸중만 듣게 되었더라도 아니면 웃음거리가 되었더라도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이나 기준이 되는 ´딴´을 응원합니다. 그것이 있어야 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외딴곳은 기도하는 사람을 부릅니다.




오늘 서울 거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릴 것이 예상됩니다.


부디 다른 사고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가을에 우리는 어떤 ´결국´을 쓰게 되려는지 광화문 거리에 가지 못하고 이렇게 먼 데에서 미안한 생각과 근심이 출렁거립니다.





* ´무료하고 쓸쓸한 나머지 ( つれつれなるままに)´라는 말은 일본 고전에서 제일 멋있는 머리말로 유명하다. ´つれつれ ´를 한자로 쓴 ´徒然´과 隨想이라는 말인 ´くさ (草)´를 하나로 묶어 『 (徒然草)』라는 책 이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