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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Nov 29. 2022

기도 59-1

프리킥 찬스입니다

2022, 1129, 화요일



밤새 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공기가 많이 차가워졌을 것입니다.


어젯밤에도 월드컵 축구 경기가 있었습니다. 석패 惜敗라는 말을 실감했던 밤이었습니다. 아깝고 아쉬움이 크다는 것은 사람이 치러야 할 대가 가운데 가장 인간적인 감정인 듯싶습니다. 그래서 그의 편으로 남습니다.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싶은 만큼 해보라며 응원합니다. 감동이 우리와 함께 머문다면 이기고 지는 일이야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 단순한 삶은 마음가짐의 산물이기 때문에 교육이 단순한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건 당연하다.


어린아이들을 교육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우리 자신을 위해 아이들을 가르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아이 자신을 위해 아이들을 가르치는 경우이다. - 사를 바그레르, 단순하게, 산다 中




두 가지 방법에서 어느 쪽에 우리는 더 가까이 있습니까.


저는 앞쪽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잠시 이 책의 저자는 어떻게 이야기를 하는지 들어보겠습니다.




¶ 첫 번째 경우 아이는 부모의 소유물로 여겨진다. 중략.


한마디로 자식은 부모 곁에서 부모에 의해, 부모를 위해 살아야 한다. 오직 그런 삶만이 용납된다. 중략.


종교 조직이든 공산주의 조직이든,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관료 조직이든 사회적 조직에서 개인은 이런 식으로 순화되고 동화되고 흡수된다. 외부에서 보면 이런 교육 시스템은 단순한 교육의 전형으로 여겨지며, 실제로 그 과정도 무척 단순하다. 인간 개개인이 고유한 개성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면, 다시 말해서 인종 人種의 표본에 불가하다면, 이 방법이 완벽한 교육일 수 있다.




조금 섬뜩했습니다. 대책 없이 아이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육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다음도 계속 들어보겠습니다.




¶ 두 번째 경우는 정반대의 교육법으로, 아이 자신을 위해 아이들을 가르치는 방법이다. 아이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며 가르치는 방법이다. 여기에서는 역할이 뒤바뀌어 부모가 자식을 위해 존재한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중심이 된다. 중략


아이의 눈에는 세상에 자기밖에 없다. 자신이 어떤 경우에도 잘못하지 않는 유일하고 완벽한 존재라고 착각한다. 뒤늦게야 사람들이 자신들의 주인을 키웠다는 걸 깨닫는다. 중략


가정만이 아니라 사회에서도 이런 교육법이 행해지고 있다. 과거가 중요하지 않은 곳, 전통도 규율도 없고 상호 존경심도 없는 곳, 쥐꼬리만큼 아는 사람이 가장 큰 목소리를 내는 곳에서는 어김없이 이런 식의 교육이 성행한다. 중략.


일시적인 열정이 득세하고, 저급한 독단이 승리하는 교육 방식이다.




공감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제 경기는 이제 잊으셔도 됩니다. 열심히 뛴 모습만 간직하고 있으며 언제든 불꽃은 피어오릅니다. 저도 아침이 늦었지만 천천히 적고 있습니다. 교육은 아이가 다 컸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니까요. 나도 나를 교육할 것이 아직 많이 남았다는 것을 매일 깨닫고 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계시지 않더라도 내 교육에 여전히 관심이 많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나는 나를 잘 가르칠 의무와 필요도 있습니다. 늦더라도, 이것이 우리의 슬로건이 되어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결론을 받아 적습니다.




¶ 두 가지 교육 방식을 비교하면, 전자는 환경을 중요시하는 교육 방식이고, 후자는 개인을 중요시하는 교육 방식이다. 나는 두 교육 방식 모두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두 방식이 결합된 방식은 그야말로 최악이라 생각한다.(여기에서 저는 아예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 교육 방식에서는 절반은 로봇이고 절반은 폭군인 인간, 달리 말하면 양처럼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마음과 반항하거나 지배하려는 마음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인간이 태어날 뿐이다.


결국 자식을 중심에 놓고 키워서도 안 되고, 부모를 중심에 놓고 키워서도 안 된다는 뜻이다. 인간은 운명적으로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나의 표본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삶다운 삶을 살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다음은 삶다운 삶에 대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옮겨 적기에는 소중한 문장들입니다. 그리고 여러 페이지에 걸쳐있습니다.


책을 사서 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누가 말해주는 답이 필요한 것은 ´사실´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받아 적기에 급급하면 우리 다음 세대들도 우리를 보면서 그게 ´방법´인 줄 알고 살아갑니다. 어쩌면 우리가 저마다 올바른 답을 이미 갖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막연하게 답 없는 것이 답이니까,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세상은 길로 이루어져 있지만 세상이 되는 길은 흔하지 않습니다. 골을 넣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질주하는 선수가 바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후반전, 남은 시간은 몇 분입니까. 스코어는 몇 대 몇입니까. 이기고 지는 승부를 하고 계십니까.




비가 내리는 화요일 아침에, 바쁜 와중에 ´메시지가 도착´하는 이 순간, 프리킥 찬스입니다.


여전히 응원합니다. 목청껏 소리 높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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