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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Dec 06. 2022

기도 64-1

지지 않는다

2022, 1206,  화요일


꿈은 아니고 기절했던 거 같습니다. 군장을 멘 채로 길섶에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 걸었습니다. 얼마나 더 가야 이 행군이 끝날까, 그 생각도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10분 휴식이란 말이 전달될 때마다 까무러쳤습니다. 부대가 멈추면 쥐 죽은 듯 고요했습니다. 모두가 잠에 빠졌습니다. 어둠 속에서 나자빠졌습니다. 숨소리만 깊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지쳤다는 말이 흘렀던 거 같습니다. 더 가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했던지 30년이 다 지난 일이지만 몸이 반응합니다. 발바닥 안쪽으로 힘줄이 긴장합니다. 발가락들이 동시에 꿈틀거립니다. 그날 이후로 ´잘 걷는다´는 말이 어설퍼졌습니다. 낯설어졌습니다. 그거 하나 믿고 군대 생활하는가 싶었는데 의지가지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집 생각이 저절로 났습니다. 지치면 생각나는 것, 그것이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월드컵 축구, 우리나라와 브라질의 경기를 보다가 묵상을 적습니다. 지쳤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니까 가만 보고 있기 어려웠습니다. 우리 선수들은 그전 경기에서 이미 힘을 다 썼습니다. 상대는 실력과 체력, 모든 면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습니다. 경기는 시간이 흐를수록 힘들어지고 안타까워질 것입니다. 날이 밝으면 그럴 줄 알았다는 탄식이 거리를 채울 것입니다. 그러나 잘했습니다. 92년,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펀치볼에서 고성군 간성읍 향로봉까지 공격했다가 가령천 주둔지로 복귀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날 산을 몇 개나 넘었을까. 새벽부터 움직인 거리는 얼마나 될까. 땀은 얼마쯤 흘렸고 원망은 얼마나 쏟았을까. 하마터면 낙오를 할 뻔했습니다. 부대까지 복귀하는 길을 너무나 멀었습니다. 그러나 잘했습니다. 절뚝거리면서 걸었어도 뿌듯했습니다.




¶ 지금까지의 삶 전체가 달리고 싶지 않아서 달리지 않은 시간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축하한다. 그렇다면 자기 의지대로 살고 있다는 뜻이니까. 그렇다면 이제는 달리고 싶을 때 달리기만 하면 된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나이가 들면 젊었을 때보다 훨씬 더 행복해진다고 한다. 이유는 나이 든 사람과 젊은 사람은 서로 다른 세상에 살기 때문에. 20대가 사는 세상은 아직 탄생한 지 30년도 지나지 않은 세상이다. 지속 시간이 짧으니 삶에는 인과보다는 우연이 더 크게 작용한다. 하지만 60대가 사는 세계는 벌써 70년 가까이 지속된 세계다. 시간이 그 정도 지속되면 결과를 통해서 원인을 따져 볼 수 있다. 노인들의 행복은 거기서 비롯된다고 한다. 그들은 예측 가능한 세계에 살기 때문에. 마라톤에 참가한다는 건 그런 예측 가능한 세계를 경험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김연수 작가의 『지지 않는다는 말』에 나오는 부분들이다. 내가 하나 바뀐 것이 있다면 책을 읽고 밑줄을 긋는 것과 그것을 옮겨 적는 것이다. 옮겨 적는 일은 읽는 일보다 더 번거롭고 수고롭다. 대학 때도 하지 않던 일이라 한참 밀려 있는 형편이다. 몸에 배지 않은 탓이다. 하지만 계속하고 싶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을 때처럼 스스로 무안한 것이 없는데 읽은 것을 옮겨 적기 하는 과정은 마치 그 부족함을 수행하는 일 같아서 깨끗하다. 한 페이지라도 그렇게 쓰면 청량감이 돈다. 대숲 바람을 쐬는 기분이다. 우리 선수들에게, 그리고 행군하고 있는 젊음들에게 ´지지 않는다´는 말을 밑줄 그어 건네고 싶다. 그들도 한번 그들의 노트에 적어봤으면 싶다. 고생이 값지다는 말은 나 같은 사람이 해서 빛나지 않는다는 걸 안다. 나는 무르고 흔한 과정을 지나왔지만 더 훌륭한 고생으로 보석이 되었으면 한다. 금강석은 영롱하면서도 강하지 않던가.




김연수 작가는 그날 이후로 달리기 시작했고 나는 쓰기 시작했다. 그러니 그대들도 시작했으면 한다.


4년을 기다린 경기들,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그것이 최선인 줄 알 수 있었다. 지지 않았다. 우리는 잘 살고 있다. 잘 달리고 있으며 잘 쓰고 있다. 지지 않았다.


그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마태오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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