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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Dec 07. 2022

기도 65-1

온유한 詩

2022, 1207, 수요일



´옮겨 적는 일은 읽는 일보다 더 번거롭고 수고롭다. 대학 때도 하지 않던 일이라 한참 밀려 있는 형편이다. 몸에 배지 않은 탓이다. 하지만 계속하고 싶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을 때처럼 스스로 무안한 것이 없는데 읽은 것을 옮겨 적기 하는 과정은 마치 그 부족함을 수행하는 일 같아서 깨끗하다.´




어제 묵상의 한 부분입니다. 글쓰기도 고해성사 같으며 싸움 같은 구석이 있습니다. 잘못을 찾아내는 과정을 지나면 잘못을 찾고 있는 자신과 마주치게 됩니다. 고해성사가 서툰 사람은 잘못한 것들을 떠올리느라 집중합니다. 글을 쓰는 행위는 샘을 하나 만드는 일 같습니다. 자꾸 퍼내야 흙이 가라앉고 이끼와 티끌이 떠내려갑니다. 물빛이란 말, 언제 들어도 투명한 그 말이 보고 싶어질 때쯤이면 삶이 온유해지는 지점 아닐까 싶습니다. 온유하려면 써야 합니다. 내 마음을 쓰고 몸을 쓰고 시간을 쓰고 또 쓸 수 있는 것은 내다 써야 합니다. 쓴다는 것은 쓰다 : 用이며, 쓰다 : 書라고 배웠습니다. 그것은 쓴맛입니다. 그러나 살리는 맛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지점은 온유, 인 듯합니다. 이제 알겠습니다. 강원도를 놀러 가더라도 제주도에 걸으러 다니더라도 지리산을 둘러보더라도 늘 내 머리와 발이 지향하는 곳은 한 점 ´따사로운 볕´이었습니다. 산사에 들러서도 교회 앞을 지나면서도 어디에서든 그와 같은 존재를 만나기를 희망했던 것입니다. 내 인상에 남아 있는 풍경에는 작은 점들이 그림을 이루고 있습니다.




¶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傳說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향수> 정지용 -




나에게 이름처럼 하나의 말을 가져다 그의 앞가슴에 붙여 주라고 그러면, 내가 고를 말은 ´해설피´입니다. 설핏한 그것입니다. 꽉 차지 않고 강렬하지 않게 엷은 것입니다. 실 같고 모래 같으며 꿈같은 그의 풍경은 ´온유´합니다.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그의 사랑이 주목 朱木을 연상시킵니다. 산, 산 위에서 천 년을 지키고 결국 산이 되는 나무.




한겨울, 다 얼어버린 날에 쓰는 그의 ´유리창´을 굳이 곁들입니다. 온유한 사람의 탄생은 슬픔이 불쏘시개가 됩니다. 타버린 재를 아껴서 쓰는 그를 늦게나마 위로합니다. 아비, 아비가 된 이 손으로 그가 앉을자리를 쓸어봅니다. 차가운 자리여도 여기 앉으세요. 시인은 죽어서도 온유를 베풀고 있습니다. 시인입니다.




¶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린거린다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치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 肺血管이 찢어진 채로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 <유리창 1> 정지용 -




얼마나 울었겠냐고 묻지 못하고 추운 날이면 나도 지우고 보고 지우고 봅니다. 내가 보는 것은 어디쯤일까. 사람이 사람을 애도하는 밤, 온유를 심지에 붙여 오래 밝힙니다. 그 기름은 사람의 기름입니다. 살다가 떠난 사람들이 내게 남겨준 따뜻하고 환한 빛입니다. 글입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을 때처럼 스스로 무안한 것이 없는데 읽은 것을 옮겨 적기 하는 과정은 마치 그 부족함을 수행하는 일 같아서 깨끗하다.´




여기는 잘못 썼습니다. 나에게 애정이 있는 사람은 그랬을 것입니다. 새벽에 쓰느라 헛짚었구나. 어제 내내 거기가 걸려서 킁킁댔습니다. 혼자서 헛기침을 해댔습니다. 글은 그렇습니다. 바꿔보겠습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을 때처럼 스스로 무안한 것도 없는데, 읽은 것을 옮겨 적기 하는 과정은 마치 그 부족함을 수행하는 일 같아서 깨끗하다. 사실은 깨끗합니다로 끝났어야 합니다. 그것까지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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