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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Dec 07. 2022

산이에게 책을

고육지책 苦肉之策


산이가 처음으로 책을 권해달라고 부탁했다. 곧 긴 겨울 방학을 앞두고 있다. 산이는 1월에 방학을 한다. 그동안 집에서 책을 읽도록 권했다. 지금처럼 자유롭고 편하게 책 읽을 수 있는 기회가 앞으로는 없을 것이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누구나 아는 것처럼 바쁘다. 마음을 돌볼 여유가 없을 만큼 시간이 제멋대로 사람을 재촉하는 시기가 바로 코앞에 와 있다. 권하기는 하겠지만 강요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안다. 억지로 읽는 책만큼 무의미한 것도 없을 것이다. 내가 아는 것을 - 비록 나 같은 사람이 좋다고 여기는 것들이지만 - 알려 주고 싶은 것은 나와 같이 후회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 나는 결정적으로 책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수학 가게라는 소설책은 마음에 들었던지, 학교에서 읽고 있다고 한다. 어제는 농구까지 하고 왔다면서 싱긋거렸다. 선수를 챘다. 왜 이렇게 늦느냐는 말로 인사하면 안 된다고 다짐하던 차에 도어록이 해제됐다. 성큼 거실로 들어서며 헤실 거리는 아이에게 말을 던지기에는 늦어버렸다. 밥 볶아 먹아라가 전부였다. 그것도 내키지 않았던지, 먹어라 할 것을 먹아라, 그랬다. 알면서 그러는 것인지, 정말 아무 눈치도 없는 것인지, 농구가 재미있었다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냄비도 들여다보고 프라이팬도 들썩여 본다. 아, 저 아이가 세력을 확장시키고 있다. 자꾸 그 영토가 넓어지고 있다. 나는 초조한 위나라의 조 승상이 되어 사태를 주시하고 있다. 오나라 손권을 닮은 산이 엄마가 늦게 돌아왔다. 저녁 모임이 있었다는 둥, 그쪽도 해설피 웃는다. 저 연합은 스마일이다. 그것으로 살벌한 세상을 풀어가려고 하는 것이 못마땅하지만 상대의 위험은 나의 유리가 아니던가. 못 본 척 넘어간다. 그런데 어쩐지 손해 본 듯한 이 감정은 도대체 무엇이냐.

라면이 먹고 싶었다며 라면도 하나 끓이고 밥도 볶아서 이중으로 차려놓고 휴대폰을 들여다보면서 실실거린다. 저것은 무슨 병법인고? 나는 쓰다만 노트를 마저 쓰고 왼손과 오른손의 역사를 살펴보고 있었다. 왼손이야말로 아무 죄가 없이 사람이 살아온 세월 내내 핍박과 억압, 차별을 받아왔구나. 나는 왼손을 아껴 보듬기로 한다. 앞으로 천하는 왼쪽을 얻는 자가 주인이 될 것을 확신한다. 산이는 쩝쩝거리기 시작했다. 쩝쩝쩝쩝쩝쩝쩝쩝~쩌어어어쩝, 성가시다.

또 다른 책 하나를 추천해 달라고 그런다. 집에서 읽는다나 뭐라나. 부국강병? 자승자강? 순간 귀는 의심했지만 심장이 반겼다. 가장 힘센 심장이 달려가면 붙잡을 방법이 마땅히 없다. 정재승의 열두 발자국을 책꽂이에서 뽑아다 급히 줬다. 나는 누구의 편이며 어느 나라의 임금인가. 그렇지 않아도 황금 돼지라고 태어날 때부터 유난하지 않았던가. 저 아이에게 책을 권하는 일은 다른 어떤 재물보다 값진 일 아니던가. 돼지가 황금을 녹여 금칠갑 金漆甲을 한다. 볼만하겠구나. 하여간 어제도 늦게까지 무슨 일(?)인가를 했던가 보다. 깨우고 어르고 나중에는 제 어미가 혼자 학교에 가라며 팽개치기 직전이었다. 나는 느긋하게 아침으로 카레를 먹으면서 이 갈등을 음미했다. 고소한 숭늉 맛이 돌았다.

그들이 모두 떠난 이 벌판에서 한가로이 겨울 정취에 빠져든다. 서리가 가득한 것이 땅만은 아니다. 늙는 것은 사양하나 고운 것에 마음이 가는 것을 어쩔 수 없다. 머리를 날리면서 수염도 쓸어본다. 한 수레 분의 책을 섭렵하지 않고 어찌 중원에 발을 내딛을까. 심심한 차에 구름 한 귀퉁이 얻어 타고서 2022년 12월에라도 다녀올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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