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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Dec 09. 2022

기도 67-1

대견해

2022, 1209, 금요일




´서로를 대견해하기로 해요. ´


우리는 모두 이렇게 말하고 싶은 사람들 아닐까. 그 말이 내게 들려왔을 때 식탁에서 거실까지 한 걸음마다 5년씩, 아니 10년씩 옛날로 다녀오는 듯했다. 10년 전 그때, 20년 전 그 계절에, 30년 전 그날도 내가 알지 못했던 지혜와 내가 읽지 못했던 감정, 그 마음 없이 사는 것이야말로 모래 위에 지은 집이었다는 것을 몇 걸음 옮기면서 미안해했다. 아나운서의 다른 말들은 흩어져 내렸고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이 이어졌다. 저 음악이 아픈 적은 없었는데, 그러라고 틀어준 것도 아닌데, 그러라며 세상에 나온 것은 더 아닐 텐데, 싶었다.




12월에는 빚을 정산하는 기분입니다. 빚이 많습니다. 다 갚지 못하고 파산 신청을 할까, 나도 해준 게 있으니까 상계하고 없는 것으로 할까. 고마운 것도 빚, 미안한 것도 빚으로 남았습니다. 빚을 청산하겠다고 크게 마음먹지도 않습니다. 이상한 빚입니다. 스트레스로 괴롭히지 않고 잠 못 자게 굴지도 않습니다. 내 좋은 빚쟁이들, 고요한 빚쟁이들이 마치 백설 공주에 나오는 일곱 난쟁이 같습니다. 나를 돕는 작은 인형들, 나를 보호하는 새벽 지기, 등대지기, 땔감 지기, 종지기, 옛 지기, 막역한 우리네 지기 知己들.




시이소오라고 적어야 한다고 ´시소´를 물끄러미 보고 있는 저녁 무렵에는 누가 다녀가는 듯합니다. 나는 모르는 나를 아는 옛날 사람들, 누군가 그럴 것입니다. ´그 아이가 네가 됐구나. ´ 오십이든 육십이든 누군가의 아이로 불립니다. 사람은 모두 옛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옛날들이 우리를 대견해하고 있습니다. 12월에는 그 손길이 전해집니다. 말 없는 말이 귓가에 앉고 어깨를 쓰다듬고 내립니다. 눈처럼 포근합니다. 지나간 것들을 투쟁하지 않고 윽박지르지 않고 성내지 않으며 애틋하게 표현합니다. 애썼다, 수고했다, 고생했다, 그런 말들이 옛날 그림자에 길게 묻어있습니다. 놀이터를 지나오면 그 말 전해주고 싶은 옛날들이 간혹 서성거리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 전하고 싶은가요? 다 자라서 여기에 없는 그 아이는 무엇이 되었을까요.




대견해할 줄 알아야 하는데, 많이 부족합니다. 감사하다는 말을 달고 살지만 온전히 그것을 배우지 못했기에 흉내만 낸 듯합니다. 모방만 하는 인생은 재미없는데 언제나 내 가게를 차리게 될지 잠시 멈춰서 지나온 길을 돌아봅니다. 정작 인사는 할 줄 모르고 인사치레에 열중입니다. 계란을 막 삶아서 껍질이 잘 벗겨지면 기분이 좋습니다. 심심한 날에는 계란을 삶아서 아이들과 하나씩 먹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날 때, 지금이 계란 맛이 가장 좋을 때입니다. 입에서도 마음에서도 따뜻한 기운이 솔솔 일어납니다. 어제는 강이에게 잘못했습니다. 아이가 대견한 것을 대견해하지 않았습니다. 알아볼 줄 모르는 나는 부족한 것들만 지적했습니다. 그것만 보였습니다. 열을 냈습니다.




¶ 세속적이라는 것은 돈이 많다거나 신분이 높은 것을 뜻하는 게 아니라 내부 문제의 해결책이 외부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당신은 외부의 조건을 바꾸면 문제가 없어지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외부 조건을 바꾸어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한 적이 없다. 언제나 그다음 문제가 일어난다. 진정으로 유일한 해결책은 ´지켜보는 의식´이 됨으로써 관점을 완전히 바꾸는 것이다.


내면의 자유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문제에 넋을 빼앗기지 않고 그것을 객관적으로 지켜볼 수 있어야만 한다.


- <상처받지 않는 영혼> 마이클 A. 싱어-




세속적이었던 것입니다. 나는 아이를 두고 세속적이었습니다. 내 그림자를 아이에게 투영한 것입니다. 늦었지만 블랙, 내가 쏟은 블랙의 시간을 닦아냅니다. 어둠이 한껏 몸을 감출 것입니다. 끈적거리는 것이 다 닦이지 않습니다. 나도 좋아지는 과정이라고 설명해 줄까. 그래서 아직 어설프고 터무니없고 지혜롭지 못해서 곤란한 것들도 있다고 말해 줄까. 아빠가 차분하게 말해도 되는 것을 흥분했다고 미안하다고 그럴까. 그냥 모른 척할까. 도대체 나는 잠만 자면 될 것을, 왜 일을 만들어 이런 갈등을 하고 있는가.




내가 즐겨 쓰는 한 글자 푸념이 등장할 차례다.




힝.




한 시간 있으면 날이 밝고 강이가 깨어납니다. 그 뒤에 어떻게 무슨 말이 강이와 아빠 사이에 있었는지 저도 궁금합니다. 살짝 미리 보고 올까 싶기도 한데, 그 이야기는 하루만 기다리면 됩니다. 계란을 맛있게 삶는 가장 중요한 비결은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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