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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Dec 10. 2022

기도 68-1

화和가 난다.

2022, 1210, 토요일


당사자끼리 긴장 상태에 놓여 있을 경우에는 중계자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어떤 중재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일이 되어가는 모양새가 달라집니다. 우연히 같은 버스에 탄 사람이 내 중재자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눈을 크게 떠야 합니다. 나도 누군가의 그 사람이 될 수 있으니까요. 길을 가다 갑자기 쓰러져 심장 마비라도 일으키거나 운전 중에 쇼크가 와서 기절을 하는 사람들에 관한 기사를 종종 대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그 위급한 상황에서 살아나고 누군가는 도움을 받지 못합니다. 옆에 사람이 있어도 사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모든 것이 서로 도와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1미터만 더 미끄러졌어도 큰일이 났을 거라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 사람들 앞에서 10센티미터, 1센티미터 때문에 살 수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입니다. 부상을 크게 입고 환자의 머릿속을 수술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1센티미터는 한강처럼 넓어 보일 것입니다. 나를 돕고 나를 살리는 중재자, 내가 돕고 내가 살리는 사람들로 우리는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나라와 나라가 긴장 상태에 놓이면 말려야 하고 정부와 국민이 갈등에 빠지면 그것을 해결하려는 정치가 필요합니다. 중재는 상황을 계산하는 자리가 아니라 구하는 자리입니다.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같이 살기 위한 노력입니다. 그 자체로 선한 행위가 되어야 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을 만나야 하고 선한 사마리아인이 될 줄 알아야 합니다.




그 말은 별로입니다. 가재는 게 편, 그 푯말이 보이면 멀리 돌아가고 싶어집니다. 길이 없다면 고개를 숙이고 지나갈 것입니다. 겉보기에는 예쁜데 속이 그렇지 못한 것이 또 있습니다. 초 草와 녹 錄은 동색 同色. 이름만 달랐지 풀빛과 녹색은 같지 않으냐는 처세담입니다. 자꾸 정치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이야말로 정치가 좋지 않게 흘러간다는 방증이 아닐까 싶습니다. 살려면 꿈틀거리기 마련인데 그때마다 정치를 들먹이게 되는 것이 여간 불편하지 않습니다. 그 X이 그 X이고, 그 XX가 그 XX. 이렇게 쓰면 기분이 덜 상하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쓰는 것 자체가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이 저만치 사라집니다. 어쩌자고 원망을 사고 욕을 먹는지 안타깝습니다. 정치가 본을 보여도 부족한데 정말이지, 좋지 못한 모습들로 가득합니다.




¶ 동 同은 이를테면 지배와 억압의 논리이며 흡수와 합병의 논리입니다. 돌이켜보면 이것은 근대사회의 일관된 논리이며 존재론의 논리이자 강철의 논리입니다. 이러한 동 同의 논리를 화 和의 논리, 즉 공존과 평화의 논리로 바꾸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강의> 신영복 -




지금부터는 생각이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생각이 다른 것이 아니라 어떤 말들에 드는 거부감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어느 쪽이든 혹시 기분이 좋지 않더라도 한 사람의 작은 생각인 것을 바람처럼 버려두셨으면 합니다. 깊이 없는 것들은 곧 흩어지고 맙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불쾌할 것도 없습니다.




한 가지로 통일하는 것이 편합니다. 짬뽕이면 짬뽕, 짜장이면 짜장. 일치단결하면 보기 좋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하지 않을 때, 누군가 하나가 우동! 그랬을 때입니다. 한 마리 양이 무리에서 떨어져 나갔을 때, 그것을 중계하는 모습 말입니다. 우리는 상황도 일사불란하게 수습합니다. 질서정연하게 말입니다. 사실 질서는 평화로울 때 더 절실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면 어지러워지지 않고 지낼 수 있으니까요. 그 질서를 저는 화 和라고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질서에는 법이 끼어듭니다. 상관합니다. 의식적이고 체벌적이며 교훈적입니다. CCTV가 많은 것이 자랑이 되고 자유의 척도가 되는 범위 안에서 우리는 딱딱, 질서를 지킵니다. 법 없으면 질서도 없습니다. 요즘 정부는 ´법대로´ 합니다. 그것이 정의로운 것인 줄 압니다. 사람들이 보고 배웁니다. 학생들이 그래도 되는 줄 압니다. 질서를 앞세워 법을 오용합니다. 법은 ´본받는다´는 뜻을 품은 동사로도 흐른다는 것을 왜 그분들은 모르는지 모르겠습니다. 휘둘리기만 하는 법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스스로를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노자의 도덕경 25편의 가르침입니다.




누구를 본받아야 할지 막연해졌습니다. 어른이 보이지 않습니다. 어른들이 모습을 감추고 절레절레 고개를 젓습니다. 모두 사양하고 있습니다. 시끄러운 소리들만 시장에 울려 퍼지고 마음은 둘 곳 없이 적적합니다. 새들이 떠나고 사람들이 떠난 뒤에는 풀이 무성할 것입니다. 그 동색 同色들 말입니다. 과연 우리의 초조함은 북한 때문인가. 북한을 이유로 우리는 초조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아닌가. 그 틈에서 기생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조정하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언제까지 한 가지만 주문하고 같아야 하며 우리와 다른 것들을 배척해야 하는가.




화 和는 좋습니다. 평화롭습니다. 쌀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화 禾입니다. 벼도 초록이지만 노랗게 익어야 먹습니다. 노랗게 익은 벼를 사람들이 먹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입 口으로 받아먹습니다. 자식 입에 밥이 들어갈 때 부모는 평화 平和가 됩니다. 입이 밥을 먹는 모습, 그와 같은 세상이 바로 화 和입니다. 똑같이 짜장면으로 통일하는 것은 동 同입니다. 그래서 입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감시하고 있습니다. 큰 막대기도 하나 떡하니, 위에 걸쳐 놓고 지키고 있습니다.




어제 아침 테이블에 앉기 전에 쓴 일기입니다.




¶ 강이가 못하는 것은 아닌데 자신 없는 모습을 보일 때 옆에 있는 내가 서글퍼진다. 그러다가 답답하고 내 탓인가 싶어서 화가 난다. 강이는 성실한 아이다. 성실한 것을 아니까 사람이 더 심란해지는 것이다. 어제는 늦은 시간에 영어 문장을 테스트했다. 수업 중에 했어야 하는 것을 제대로 암기하지 못했다고 그래서 자기 전에 보기로 했던 것이다. 사실 지적하자면 강이는 엊그제에도 그랬다. 그날도 저녁에 다시 보기로 하고서, 결국 내 마음이 약해졌던 것이다. 하루 종일 공부하느라 피곤한 아이에게 너무한다 싶어서 내가 먼저, 그러지 말고 다음부터는 잘하라는 말로 강이의 저녁 휴식을 방해하지 않았다. 강이를 혼내고 나면 자책을 하게 된다. 나는 그만큼 하지 못했던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어서, 괜한 짓을 했다는 자책이 밀려든다.




어제도 결론적으로 어설펐다. 과장되거나 억지스럽게 화를 내고 말았다. 정신병 환자처럼 사방에서 나를 보는 시선을 느낀다. 드라마를 찍는 것도 같고, 1인 극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강이만 모르고 있는 듯한.




중학교 가기 전에 한 번쯤 긴장할 재료로 써도 괜찮겠다는 생각과 여기에서 더 말이 나가면 내가 후회할 텐데 싶은 마음도, 강이가 당당하게 눈길을 피하지 않는 것이 대견하게 여겨지면서 동시에 그럴 줄 알면서 왜 공부는 그렇게 허술하게 하는지 따지고 싶었다. 한마디로 복합적이었다.




상처받지 않는 영혼이란 책을 보고 있는데, 타이밍이 기가 막히다.


실습을 실감 나게 한 것 같다.


아마 강이에게 화낸 것을 중화시키려면 10일은 더 아이 기분을 맞춰줘야 할지도 모른다. 내 장사법은 이렇게 늘 손해다.


- 2022, 1209, 日記




무엇인가를 - 그게 무엇이든 - 잠시라도 적어보는 것은 약 藥입니다. 통증을 완화 緩和 시키고 사람을 온화 溫和 하게 담습니다. 사람이 약을 먹는 게 아니라 약이 사람을 보듬습니다. 그런 약이 좋은 약입니다. 걷기와 쓰기는 사람의 왼팔과 오른팔 같습니다. 믿음과 신앙 같고 밥과 물 같습니다. 벗과 애인 같습니다. 자식과 아내 같습니다. 시와 소설 같고 바람과 구름 같습니다. 하늘과 땅이 흥겨워하면 사람은 저절로 어깨가 들썩입니다. 천, 지, 인은 서로 조화롭습니다.




테이블에서 그랬습니다. 걱정 인형을 옆에 놓아두고 하느님한테 기도했다는 강이 이야기를 강이 엄마가 그 아침에 들려줬습니다. 아빠가 학원 다니지 말라고 했는데 그것도 기도하고 잘 거라며 울었단 말을 듣고 살짝 목이 메었습니다. 어린것에게 너무 했다 싶어서 미안했습니다.


쭈뼛거리며 눈치를 살피는 아이에게 아빠가 화를 내지 않고 말할 수 있었는데 그 기회를 놓쳤다고 했습니다. 학원에 다니지 말라는 말이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아무 느낌 없이 학원에 다니지 말라는 말이 하고 싶었던 거라고 말해줬습니다. 그것이 일상이더라도 우리는 이 일상이 고마운 것을 조금은 알 필요가 있다고 일렀습니다. 고마운 마음이 차이를 만든다고 그 말 하고 싶었는데 화를 내고 말았다고. 아무래도 나이 많은 아비는 초조한 것 같습니다. 어린것에게 밤부터 아침까지 철봉에 매달리게 하는 연습을 시키는 것만 같았습니다. 아무래도 괜찮아, 그런 말 나도 해주고 싶은데, 어쩐지 그게 잘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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