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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Dec 17. 2022

기도 74-1

짱깨

2022, 1217, 토요일



첫인상, 시대가 가면 갈수록 중요해지는 것 같습니다. 더 짧아지고 더 강렬해진 분위기입니다.


누구나 거기에 걸려들지만 아무나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내가 아니라 내 앞에 선 이가 나를 결정합니다. 말 한마디 없이 순식간에 나는 판단됩니다. 거기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다지 변수가 많지 않습니다. 나를 요리합니다. 계란으로 만들 수 있는 요리는 셀 수 없이 많던데 일관되게 나는 프라이입니다. 오므라이스가 되고 싶었지만 그에게 나는 계란 프라이로만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꽃을 보고 연필을 보고 하늘도 봅니다. 사람이 재단사로 살아보는 공간입니다. 그에게 맡겨진 것들입니다. 꽃으로 입는 옷, 연필로 신어보는 신발, 머리에 써보는 하늘, 사람이 만든 것과 하늘이 세상에 내놓은 것들은 여기가 다릅니다. 사람은 들어갔으면 나오는 문이 있어야 합니다. 나오는 문으로 나와야 합리적입니다. 그래서 1+1은 항상 2여야 합니다. 꽃은 꽃, 연필은 연필, 하늘은 하늘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보기 좋고 머리 아프지 않습니다. 그 드라마의 대사가 나는 아팠습니다.




¶ 애기씨 : 아홉 살 아이가 무슨 연유로?




사내 : 죽여라, 재산이 축나는 건 아까우나 종놈들에게 좋은 본을 보이니 손해는 아닐 것이다.


그게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조선이요.




애기씨 : 누가 그런 말을 했단 말이오?




사내 : 상전이었던 양반이.


(잠시 애기씨의 상기된 얼굴 보이고)


무엇에 놀란 거요, 양반의 말에? 아님 내 신분에?


맞소, 조선에서 나는 노비였소.


(차가운 강바람이 애기씨 얼굴에 스민다. 눈빛이 아슴하다.)


(결연하게, 남자 말을 잇는다.)


귀하가 구하려는 조선에는 누가 사는 거요. 백정은 살 수 있소? 노비는 살 수 있소?




미스터 선샤인의 한 대목입니다.


내가 기억하는 교육과 사회와 사람들은 ´첫인상´에 충실한 시스템이었습니다. 내가 창기와 영기와 수덕이, 철원이를 끝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내 아무것도 아닌 첫인상을 지금까지 잘 견뎌주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나는 늘 그들에게 ´우영이´였지, ´짜장면 집 애´가 아니었습니다. 6학년 때 같은 반 친구가 나를 그렇게 불렀을 때 무척 더웠습니다. 나 혼자 이 넓은 세상에 서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짱깨! ´




그래서 그 이야기를 언제고 쓸 생각입니다. 첫인상은 과연 나인가. 첫인상은 하늘인가.




클래식, 시간이 지나면서 가치가 더해지는 것. 깊이가 더해지고 울림이 곁들여지는 세상이 클래식 같습니다. 미처 모르고 살았던 것을 늦게서야 깨닫고 있습니다. 늦었지만 조급하지 않아서 좋은 것도 있습니다. 나에는 후광 같은 것이 없습니다. 그것을 자랑으로 삼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클래식을 들으면서 생겨나고 있습니다. 1년 동안 매일 책을 읽었고 매일 음악을 들었습니다. 내가 결코 한가한 것은 아닙니다. 나도 일을 합니다. 금방 피곤해지고 그러면 누워야 하고 열이 오르면 어지러웠습니다. 먹으면 토했고 많이 먹으면 식은땀이 났습니다. 후회가 통증의 크기에 따라 달라집니다. 매일 쓰기도 했습니다. 매일 아이들과 티격태격했으며 그것도 고맙다고 적었습니다. 눈이 서해안으로 많이 내리니까 주의하라고 안전 문자가 벌써 5통이 넘었습니다. 내 첫인상을 보러 가야 하는데 길이 좋지 않습니다. 눈이 많아서 길이 미끄러우면 다음으로 미룰 것입니다. 다들 아무 말도 없이 하늘만 봤을 거 같습니다. 얼굴을 보긴 해야겠는데, 약속도 했는데 어떡하나 그랬을 것입니다.




없는 듯 있는 이들, 기억을 기억하지 않고 늘 거기에서 시작하는 이들, 나는 그 사람들에게서 ´족보´를 봅니다. 본관도 없고 항렬 없이도, 다른 것들 없이도 편하고 즐겁고 애틋하고 이야기를 낳는. 언제쯤 그네들 없이도 나는 살 수 있을까 싶습니다. 아마 그날은 영영 오지 않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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