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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Dec 24. 2022

기도 80-1

두 손 모아 빈다

2022, 1224,  토요일



어제 ´우유배달´ 이야기가 신선했던 거 같습니다. 그 말 생각나실까요?


´낯선 이에게 친절하라. 그는 변장한 천사일지도 모른다. ´


헤밍웨이가 문장으로 소개했던 서점, 거기 어디 쓰여있다는 저 말.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에서 책을 빌리곤 했다. 겨울이 되면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쌀쌀한 거리에 있는 그 서점에서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위해 입구에 커다란 난로를 피워 놓았다. 따뜻하고, 쾌적하고, 멋진 곳이었다."


저 말은 아직 유효합니까.




어떤 현상이든 자주 반복되는 것은 하나의 신호로 해석됩니다. 그것이 중요해졌거나 적어도 어떤 조치가 필요한 시점에 도달했다는 바로미터가 됩니다. 어떤 정치적 슬로건이 정치인들 입에 오르내리면 사회는 이미 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는 뜻입니다. 스포츠며 경제, 정치는 물론, 사회 전반적으로 빅데이터를 제시하며 다음 단계를 준비합니다. 눈이 내리는 것도 건강 검진을 받는 일도 모두 분석하고 통계를 내어 하나의 정보로 활용됩니다. 자료는 통제가 용이합니다. 무엇보다도 정확도가 높습니다. 사람의 감정마저도 수치화되고 량화되어 증상이나 현상으로 이론화됩니다. 표본화가 그것입니다. 딸아이가 아빠는 MBTI가 도대체 감이 안 잡힌다고 앞에서 떠듭니다. 어떤 때는 내성적인 것 같은데 또 놀 때 보면 ´세게´ 논다고 잘 모르겠답니다. 결국 나 같은 사람도 하나의 데이터로 남을 것입니다. 차곡차곡 쌓아가는 것이 삶이 아니라 그런 데이터 아닌가 싶어, 움찔합니다. 휴대폰은 나를 도우면서 점점 사문화 死文化* 시키는 것 같습니다. 내 정보가 의미가 있을 뿐이지 나는 별 상관없는 별이 되어 갑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낯선 이에게 더 이상 친절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도 안 되는 것 같고. 어떤 낯선 이는 변장한 천사이겠지만 그 반대의 모습도 우리는 얼마든지 목격하고 경험합니다. 딸 가진 어느 부모가 낯선 이에게 친절하라고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혼돈된 상태이며 균형이 깨지고 위기가 몰려오는 - 한마디로 ´자연스럽지 않은´, 물론 자연스럽다는 것도 우리의 자연스러운 상태가 아니라 사상이며 교육일 것입니다만 - 것을 언덕 위에서 바라보는 기분입니다. 폭풍의 언덕처럼 말입니다.




몸은 아픈 곳을 드러내고 마음도 그것을 밖으로 흘려냅니다. 물이 신호입니다. 피가 흐르고 눈물이 흐르면 아픈 것입니다. 갈증이 나면 물을 찾습니다. 회복하려는 첫 단계는 물입니다. 어떤 문장들은 갈증을 나타내고 우리에게 물을 마시라고 권합니다. 친절하라는 말은 친절하지 않아서 곧 문제가 될 것 같다는 말입니다. 조급증 환자들은 그 ´곧´이 언제냐고 묻습니다. 2천 년 전에도 ´곧´ 아니었냐고 따집니다. 그래서 자기 살아 있을 때 어느 쪽이든 결단을 짓고자 합니다. 물 한 모금 마실 시간이 없으면서 결판 짓고자 합니다. 영원이 되는 순간들이야말로 사람의 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순간이 되는 영원은 하느님의, 하느님에 의한, 하느님을 위한 시간입니다. 우리는 자꾸 영원히 살려고 헛발질을 합니다. 꿈속에서 그랬던 것처럼 땅에서도 그러고 있습니다. 나는 내 순간들을 모으고 있습니다. 찰나, 사금파리처럼 반짝였던 한순간, 그것으로 족합니다. 무수한 점들이 흩어져 있어서 즐겁습니다. 술래잡기 같고 보물찾기 같습니다.




그때, 남양 우유였습니다. 우유 배달이 꼭 서글픈 현실만을 대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그 부분을 조심합니다. 언제나 ´청소´부터 시작하는 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라고 믿는 편이라, 그것은 일종의 정리 정돈이었습니다. 나는 움직이고 싶었지만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해서 대신 찾은 곳이 아파트 우유 배달이었던 것입니다. 굳이 이야기를 이어가는 것은 어제 받은 작은 사진 때문입니다. 잘 알지는 못하는 분인데 물끄러미 바라봤습니다. 좀 쑥스러워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내 접시에 따로 덜어서 먹어 보고 싶어 졌습니다. 처음으로 그런 기분이 들었습니다. 나는 나한테 정말 인색한 사람이었습니다. 믿지 않겠지만, 혼잣말하면서 그럽니다. 다음에는 ´나를 만나지 말자´, 다음에는 ´내 몸이 되지 마라´, 너한테 고생했다고 그래야 하나, 좋았다고 그래야 하나, 정말 망설여질 것 같아서 그날이 서럽다.




어제는 그 말이 예뻐 보여서 그대로 내가 입어보기로 했습니다. 카톡 프사에도 올려놓고 나 아닌 척, 가만히 있었습니다. - 이런 때, 일본 말로 닷떼 크리스마스데쇼, だってクリスマスでしょ。 그러는데, 그러면 느낌이 확 사는데 - 그대로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에피소드가 생각났습니다. 우유 한 통을 배달하면 - 잊어서 기억이 흐릿합니다 - 몇 십 원씩, 그것이 한 달 적립되어 월급이 됩니다. 그때 가장 단가가 좋았던 것이 ´비피더스´ 그거 하나 배달하면 100원 남았던 거 같습니다. 비피더스를 매일 마시는 집이 있었습니다. 우유 배달이 좋은 점은 일주일에 3번만 움직이면 됩니다. 그러니까 이틀 치를 한 번에 투입하거나 명절 때는 3일 치도 그렇게 처리합니다. 꽤 전문가 자세가 나오지 않습니까!


그 집을 수금 때면 몇 번을 찾아가는지 모릅니다. 한 번도 주인을 마주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 누가 사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다른 이웃분이 알려주셨는데 그 집주인을 처음 본 장소는 아파트에 있는 슈퍼 앞이었습니다. 낮부터 술에 취한 모습이었습니다. 혼자 살고, 중년에서 조금 더 나이가 든, 벌써 몸이 많이 마른, 아저씨였습니다. 3달이 밀리고 나서 ´갈등´이 시작됐습니다. 수금을 받지 못하면 그 돈은 월급으로 계산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내 돈으로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셈이었습니다. 몇 호에 사시는 분이시지요?라고까지 물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날도 슈퍼 앞, 파라솔에 앉아 계셨습니다. 문제는 내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눈동자였습니다. 그만 말을 멈추고 돌아왔습니다.


어떻게 됐을까요?


그 뒤로 몇 개월인가 더 새벽 배달을 했습니다. 그때까지 그 집에 비피더스를 넣었습니다. 마음을 아예 비웠더니 그게 가능했습니다. 40만 원짜리 알바가 3만 원을 그렇게 썼습니다. 저는 그것을 자랑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아이들이 책을 좀 읽었으면 싶은 것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저는 인문학의 힘을 믿는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시를 외우고 있으면 시인이 될 것 같은 기분, 시인이 되지 못하더라도 그 분위기를 즐길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습니다. 교수도 되고 소설을 쓰면 좋지만 우선 그 길에서 내가 많이 떨어져 있지 않다는 자기 확신, 그런 안도감이 좋습니다. 실력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력은 쌓으면 되는 것이지만 향기는 맛과 같은 것이라서 분석되지 못합니다. 맛을 잃고 싶지 않다는 그 마음이 조금은 이해되실까요?




크리스마스이브니까 저도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 당신, 참 예쁘다.


사느라, 살아내느라, 여기까지 오느라 애썼다.


부디, 당신의 가장 행복한 시절이 아직 오지 않았기를 두 손 모아 빈다.




이런 것이 영원을 사는 순간인 듯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 사문화 死文化 - 입법화된 법이 현실 상이나 판례 상에서 사실상 없는 것과 같은 '죽은' 법이 되어버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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