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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Dec 23. 2022

기도 79-1

대설주의보

2022, 1224, 금요일



참석하지 못한 결혼식이 몇 개 있습니다. 영기, 규돈이 만모 결혼식에 가지 못했습니다. 그때는 우리나라에 있지 않았으니까 친구들도 그런 줄 알았을 겁니다. 그것이 늘 마음의 빚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날짜를 기억하고 있는 또 하나의 결혼식이 있습니다. 그 결혼식을 떠올리면 두 가지가 생각납니다. 눈 그리고 어?




2003년 3월 1일은 토요일이었고 그날 대전에는 기록적인 눈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그 이튿날은 일요일, 그때가 아마 경계였을 겁니다. 토요일에 하는 결혼식.


악착같이 덤빌 줄 알아야 한다, 악착같은 구석이 없어서, 악착 齷齪, 손이나 발로 못하면 이라도 써서 꽉 물고 있는 모습이 악착입니다. 이상하게 그런 식으로 아버지한테 혼나면 더 물러졌습니다. 뒤가 물러서,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어렴풋이 짐작은 갔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안 돼, 그 말이 늘 뒤에 붙었습니다. 아버지만큼 절대 부지런하게 살 수 없다는 것을 일찍부터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면에서 제 롤 모델이었습니다. ´아버지처럼´ 그런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때도 아무 계획 없이 도중에 차에서 내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많이 심란했습니다. 한국에 왔지만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었습니다. 내가 바뀌지 않았으니까요. 다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친구들은 모두 자기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는데 혼자 낙오된 기분이었습니다. 깊은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지면 제 힘으로 벗어나기가 어렵다는 것을 실감하는 나날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전화를 받았습니다. 언제나 반가운 목소리, 정현이.




그랬을 것입니다. ´3월 1일, 토요일´에 결혼한다고.


정현이는 하나 있는 대전 친구입니다. 재수 시절 친구입니다. 나는 그 친구의 넉넉함을 좋아했고 지금은 존경합니다. 부자여서가 아니라 진짜 부자여서 그렇습니다. 교회를 잘 다니는 사람은 구김살이 없어서 보기 좋습니다. 정현이는 그런 마음을 가진 듯합니다. 밤에 다려 놓은 옷, 새벽에 달인 탕약. 무엇인가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은 보드랍고 먹기 좋고 편합니다. 카스텔라 같습니다.




처음 고백하는 것인데 그때 우유배달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유배달이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 줄 알았습니다. 눈이 내리는 새벽에 계단을 뛰어다녔습니다. 그날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일요일에는 우유배달도 쉽니다. 정말이지, 눈에 눈이 들어가면 눈물인지, 눈물인지 헷갈렸습니다. 나는 또 아무 기약 없이 외딴 역에 홀로 내린 객 客이 되어 객 喀하고 있었습니다. 겨우 30년 산 인생을 토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마 날짜를 잊었을 겁니다. 3월 첫 번째 일요일, 그렇게 저장하고 다시 우유를 날랐던 거 같습니다. 옛날에는 아이들이 신문을 날랐지만 아주머니들이 새벽 신문을 나르는 것을 알았습니다. 보는 대로 인사를 했습니다. 누가 누구인지 전혀 모르고 그 시간 그 장소 그 복장을 보면서 고개를 숙이고 인사했습니다. 그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젊은 사람이 그것도 남자가 사람을 피하지도 않고 씩씩한 목소리로 매일 인사를 해서´ 그 덕분에 삼겹살도 얻어먹었습니다.


나는 전혀 씩씩하지 않았습니다. 창피했고 불편했으며 어색했고 억울했습니다. 무엇보다 슬펐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내 문제였으니까, 아주머니들에게는 웃으며 인사를 했습니다. 아주머니들은 운동 삼아서 배달을 한다고는 하지만 배달은 ´수금´ 때문에 초라한 운동입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자기가 내야 할 돈을 잘 내지 않습니다. 내 인생은 ´생각 없이´ 돈이 밀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합니다. 돈이 밀리게 생겼으면 미리 말해 주는 습관도 챙겼습니다. 적은 돈일수록 그게 더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급하게 보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거기가 출발점입니다.




그러다가 착각했습니다. 일요일 결혼식으로 철석같이 여겼습니다. 악착같이, 아니라 철석같이. 차라리 그게 저하고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쇠나 돌처럼 굳고 단단하게는 어쩌다가 저 같은 사람을 만났을까. 바보같이 왜 그랬을까. 당연히 1일이 아니라 2일로 날짜가 자연스럽게 변경되었습니다. 내 머릿속에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마침 눈이 내렸던 것입니다. 온통 천지가 하얗게 덮였습니다.




정현이는 토요일 결혼식을 마치고 ´눈이 많이 와서 못 왔냐? ´며 되레 안부를 물었습니다. 다른 하객들도 눈 때문에 길이 막혔다고 그랬습니다. 그날이, 그 시간이 그대로 조각된 느낌이었습니다. 아니면 석고 뜨기를 한 것 같은.




어제도 눈이 내렸습니다. 큰 눈을 볼 때마다 정현이 결혼식에 못 갔는데, 그런 숨소리가 납니다. 지나간 것들이 고마운 순간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정현이 딸, 첫돌이었던 날에도 눈이 쏟아졌습니다. 그날은 차를 세워두고 기차 타고 대전에 갔습니다. 그렇게 보고 싶은 사람들이 우리 곁에는 있습니다. 막 보고 싶어 집니다.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 루카 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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