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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Jan 03. 2023

기도 84-1

새벽에 쓴 편지

2023, 0103, 화요일

영화 6도, 저번에 내린 눈이 그늘진 곳에는 아직 남아있습니다. 빙판을 이룬 곳도 있어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누구나 조심해야겠습니다. 기도는 하지 않고 오늘 새벽에는 산이 선생님께 편지를 썼습니다. 내일이 졸업이라 더 미룰 수가 없었습니다. 편지를 같이 읽는 것은 그것이 ´권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 견주어 말하자면 ´세례´와 비슷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세례는 햇빛 같은 거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말이  생각나는,  ´비쳐오는 이 햇빛에 떳떳할 수가 있는 것은*/ 이 햇빛에서도 예금통장은 없을 테니까... ´

오늘 아침은 편지입니다.

맛있고 즐거운 식사가 됐으면 합니다.


* 천상병의 시, 나의 가난은 한 대목

전** 선생님께.

선생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올해 처음 쓰는 산이 일기를 이렇게 선생님께 드리는 편지로 시작하게 된 것이 저에게는 어쩐지 복스러운 느낌입니다.

그러고 보니 소복하다는 느낌을 까맣게 잊었던 것 같습니다. 12월에 눈이 내렸을 때, 왜 그 느낌을 떠올리지 못했을까, 방금 생각이 났습니다. 느낌도 두드려야 열리는 문 같은 것이 됐구나.

안녕하세요, 선생님. 제법 정다운 투로 인사를 건네는 저는 강산이 아빠입니다.

어색하고 낯선 기분으로 이 편지를 열어보셨을 텐데, 이쯤에서는 편한 마음으로 갈아입고 천천히 읽으셔도 된다고 미리 말씀드립니다. 1년 동안 애써주신 선생님께 드리는 작은 감사 편지입니다.

사실 지난 12월부터 편지를 쓸 생각이었습니다. 아, 이런 경험이 드물겠지만 저는 익숙한 편입니다. 산이 4살 때부터 산이 선생님들께 매년 써왔던 편지입니다. 방금 이 문장은 그러니까 13번째 쓰고 있습니다. 앞으로 고등학교 3년을 더 쓰고 싶습니다. 늘 마지막 날에 그동안 고마웠다는 인사를 드렸었는데 이상하게 이번에는 서둘렀습니다. 산이 동생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산이는 중학교 졸업이라서, ´졸업´이라는 말에 마음이 조급했던 거 같습니다.

12월 31일에 저희 가족은 영화를 봤습니다. 거실에 둘러앉아 가끔 보는 영화는 꽤 흐뭇한 장면이 되어 줍니다. 마치 내가 나이를 더 먹고 옛날을 떠올릴 때 ´등불´처럼 빛이 나는 장면 같아서 기분이 좋습니다. 이번에 본 영화는 류승룡과 염정아 주연의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뮤지컬 영화였습니다. 선생님도 아실 것 같습니다. 영화가 사람을 웃기고 울리면서도 잔잔한 것이 솜씨가 좋아 보였습니다. 거기 나오는 엄마, 염정아는 폐암 말기 환자여서 가족과 이별을 합니다. 중학생 딸, 고등학생 아들을 두고 자기를 위해 모인 사람들에게 이야기합니다.

¶ "지나가다가 우리 예진이랑 서진이를 보면 밥은 먹었니, 약은 챙겨 먹었냐고 꼭 좀 물어봐 주세요. 그리고 혹시 아이들이 나쁜 짓 하고 있으면 부모 같은 마음으로 혼내주세요."

그러니까 2013년에서 2022년까지 10년 동안 있었던 일 중에서 저에게 가장 마음 아팠던 것은 무엇이었냐고 누가 묻는다면 저는 그날을 꼽을 것 같습니다.

¶ 벌써 2년도 더 지난 일이다.

아침에 등교하던 아이가 그런다.

"아빠, 우리 학교에 네잎클로버가 엄청 많아"

나는 산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2학년 아이들이 으레 그렇듯이 자랑하느라 느낌을 과장한다고 여겼었다.

"네잎클로버 하나에 5백 원 줄게"

네잎클로버를 오랜만에 실제로 보고 싶었다.

혹시라도 두세 개 따오면 가르치는 학생에게 선물로 주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무엇보다 산이에게 네잎클로버를 찾아내는 반가움을 오랫동안 간직하길 바랐었던 것이다.

그날은 오늘처럼 비가 내렸었다.

쏟아지는 빗줄기는 아니었고 대지를 촉촉하게 적시는 봄비였다.

그날 나는 암이라는 소식을 전달받았다.

당황했다기보다는 적적했다.

마흔여섯, 마흔여섯을 책상에 자꾸 써보는 중에도 시계 초침 소리는 무심히 공간을 채우면서 오후가 지나가고 있었다.

일도 손에 잡히지 않고 휴대폰이 진동으로 울려도 받지 않았다.

그러다가 산이가 학교에서 넘어졌다는 문자를 받고 전화를 했다.

"산이가 비가 와서 미끄러운데 달리다가 넘어져서 이빨이 부러졌어요."

"곧 가겠습니다."

담임 선생님과 처음 나눈 대화는 인사도 못하고 짧게 끝났다.

학교에 달려가서 마주친 아이는 입술이 터져있고 솜뭉치를 입에 물고 있었다.

앞니는 부러졌다.

눈에는 눈물이 글썽이면서 저도 당황스러웠는지 울음을 속으로 간신히 울어내고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그렇게 말했어야 했는데, 우는 아이를 먼저 안아줬어야 했는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이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산이는 그날 저에게 네잎클로버를 가져다주려고 수업이 끝나자마자 친구들과 밖으로 뛰어나가다가 밀쳐져 넘어졌던 것입니다. 놀란 아이들은 모두들 모른다고 그랬고 산이만 영문도 모른 채 울고 있었습니다. 산이는 9살, 2학년이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그때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우리는 조금 다행이구나, 이렇게 다 같이 있어서 좋구나. 한 해를 마무리하는 장면치고는 꽤 그럴듯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더 늦기 전에 선생님께 편지를 쓰고 싶었습니다.

너는 선생님하고 기억나는 것들이 뭐가 있냐고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아이가 허공을 올려보더니 ´많이 한 것이 없다´라고 얼버무렸습니다. 그래도 하나쯤 에피소드가 있을 거 아니냐고 재촉했습니다. 산이는 과학 시간에 있었던 일을 들려줬습니다.

"사실 그날 다른 애들도 공부 안 하고 시끄러웠거든, 교과서를 읽으라고 해서 읽었는데 나한테도 안 읽었다고 그러시는 거야."

"진짜 읽었거든."

산이가 커가면서 예전에 느끼지 못했던 어려움들이 저에게도 생겼습니다. 이 말을 하면 어떻게 받아들일까 먼저 생각하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그래서 선생님들께 고마운 것들과 의지하는 것들이 더 커지는 것도 같습니다. 저는 선생님이 고맙습니다. 아이가 1년 동안 학교를 좋아하고 학교에 가는 것을 즐거워했습니다. 아침이면 어김없이 학교로 출발하는 아이에게서 햇살처럼 밝은 표정을 볼 수 있었던 날들이었습니다. 거기에 선생님의 손길이 머물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새벽에 쓴 이 편지를 아침에 프린트해서 산이에게 건네주며 말할 것입니다.

"꼭 선생님 드려, 가능하면 학교 가는 대로."

인생은 아름다워, 그 영화는 이별할 것을 알고 이별하는 순간까지의 스토리입니다. 이별을 준비하고 맞이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1월 3일, 화요일이고 내일은 1월 4일, 수요일, 졸업하는 날입니다. 영화가 삶은 아니지만 삶이 영화 같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하루는 그 자체로 영화 같습니다. 벌써 하루짜리 영화는 시작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가 끝나면 졸업입니다.

선생님 내내 감사했습니다.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시고 행복하시길 바라겠습니다.

​2023년 새해, 산이 아빠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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