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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Jan 29. 2023

영화, 리틀 보이

깊어서 잔잔했구나

영화 : 리틀 보이 Little Boy


눈발이 날리는 토요일 오후였다. 좀 걸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내 바람이 꺾였다. 밖에 나가지 않고 밖을 응시했다. 하늘거리는 것은 없고 마구잡이로 흩날리는 조각들이 넓은 창에 가득했다. 여기 날아와 창에 부딪힐까 싶으면서도 휘 멀어져 갔다. 눈송이가 다 되지 못한 솜털같이 작은 모양들, 네온사인도 켜지지 않은 길거리에서 춤을 추느라 정신이 없었다. 올겨울 눈 구경은 다 끝났나, 눈이 쌓이면 심란해할 것이면서 괜히 아쉬운 맘이 돌았다. 눈사람을 만들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그만 눈사람, 만약 눈이 쌓이면 그에게 이름 붙여주고 싶다. 리틀 보이.

설 연휴 마지막 날에 강이가 추천한 영화 - 그 영화 제목은 생략한다. -는 별로였다. 강이한테는 미안하지만 무슨 맛인지 모르겠는 요리 같았다. 심지어 국인지 찌개인지, 찬인지 밥인지도 헷갈렸다. 피곤한 것을 달래고 다음날을 즐겁게 맞이하고 싶어서 봤던 영화였는데 영 기대치에 미치지 못했다. 강이 눈치를 보면서 하품을 참았다가 마지막에는 나도 모르게 푸념이 흘러나왔다. 아, 정말 재미없다.

그렇게 말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강이는 엄마한테 그건 에티켓이 아니라고 열심히 이야기했다고 한다. 최소한 영화를 추천해 준 사람 앞에서 아빠처럼 말하면 안 된다고 따끔하게 엄마를 혼냈다는 것이다. 나는 바로 잠이 들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 그래서 오늘은 내가 골랐다. 키워드를 '따뜻한'으로 검색했다. 몇 개의 영화가 있었는데 우리도 제법 영화를 본 편에 속했다. 그다음 '가족'으로 검색된 영화들을 훑어봤다. 애니메이션 영화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다가 리틀 보이, 별 4개 반, 더 이상 키가 자라지 않는 소년 '페퍼'가 전쟁에 나간 아빠를 기다리는 이야기를 선택했다. 은근한 책임을 느꼈다. 결정적으로 '차별'이란 단어가 눈에 보였기에 놓치고 싶지 않았다. 리틀, 귀엽지만 뭔가 소외되고 문제의식이 전해져 오는 형용사 아니던가. 산이하고 강이는 또래보다 키가 작은 편이다. 겉으로는 괜찮다고 그러지만 가장 민감한 문제다. 아이들도 키가 크고 싶고 부모 또한 키가 훌쩍 자라기를 바란다. 매년 겨울만 되면 우리 집에서 자주 듣는 말, '이번 겨울에는 키가 좀 커서'. 그 말이 어느새 소원 같은 말이 되어 버렸다.

영화나 소설, 드라마에 자신을 겹쳐 보는 일은 사람이 누리는 상상력 가운데 제일 재미있는 부분 아닐까. 아니면 가장 맛있거나 영양가 높은 부분. 그렇게 꿈을 꾼 사람들이 세상에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을 것이다. 연극을 보면서 꾼 꿈, 나는 아직도 노인과 바다의 겉표지를 보면 어부가 되고 싶다는 상념에 빠진다. 전쟁 영화를 보면 쏟아지는 총탄 속에서 부상자를 업고 무사히 대피시키는 사람이 나여야만 할 것 같아서 무릎에 힘이 들어간다.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을 보면서 나는 일본인 미국인 조선인이 다 되었다. 그때마다 탄성과 탄식을 번갈아 가며 쏟아냈다. 아픈 역사를 슬프게 장식하는 연주곡들 사이를 유영하며 시대를 관통하고자 했다. 여기에 있는 것을 가지고 거기로 달려가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다 풀어주고 싶었다. 눈을 뜨고 꾸는 꿈이 나는 좋다. 현실이라고 부르는 저 무게감이 무중력에 놓이는 것을 실험하는 내 꿈이 유쾌해서 좋다. 우리 리틀 보이를 보기로 하자.

You believe you can do it.

소년은 파트너를 가진다. 작은 키로 세상을 살아가기에 힘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누구에게나 비결 하나쯤 있다면 얼마나 든든할까. 아버지는 페퍼에게 비결 하나를 쥐여준다. 믿어라, 믿음대로 될 것을 믿어라. 그러고 보니 페퍼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분일 수도 있겠구나. 곁에 없어도 늘 있었던 사람, 그 사람 때문에 애써 내가 노력하게 되는 사람. 페퍼는 전쟁터에 나간 아버지를 내내 기다린다. 신발, 이 영화는 성경에서처럼 비유와 상징이 풍부하다. 신발은 영화의 처음과 끝을 솜씨 좋은 장인처럼 이어 붙인다. 키가 작은 아이가 아빠 신을 신고 비로소 우쭐해지고 아빠는 신발 때문에 전사 처리되었다가 뒤바뀌게 된다. 신발이 바뀌면 삶과 죽음도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그리고 페퍼가 사놓고 기다린 신발이 아빠를 대신한다. 결국 아빠가 돌아와 신발은 주인을 찾게 된다. '겨자씨 만 한 믿음만 있어도'

이 장면은 잔잔하고도 깊었다.

소년 : 믿었던 제가 바보였나 봐요.

- 마술 극장에서 했던 것처럼 올리버 신부 앞에서도 탁자 위에 있는 병을 손을 대지 않고 옮겨 보겠다며 시도하다가 결국 실망하며

올리버 신부 : 다시 해보렴.

소년 : ( 최고로 진지한 표정으로 두 손을 뻗어 손끝에 힘을 모으고 ) 으으으으으으으아!

올리버 신부 : 자, 움직였다.

- 올리버 신부가 유리병을 자기 앞에 있던 유리병을 탁자 저쪽으로 옮겨놓으며

소년 : 아니, 그건 신부님이 옮기신 거잖아요.

올리버 신부 : 너한테 감동해서 병을 옮긴 거다. 내가 옮겼지만 네가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야. 그게 바로 믿음의 힘이란다. 늘 되는 건 아니지만 ·····

마을 사람들은 그 마을에 사는 일본인, 하시모토를 증오한다. 특히 아들이 전쟁에 나가 죽은 샘은 하시모토가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그를 죽음 직전으로 몰아간다. 페퍼에게 처음 말을 건네는 하시모토의 말은 부탁이며 애원이었고 최소한이었다. 내 이름은 쨉 jap이 아니야, 나는 하시모토야.

우리에게도 쨉 jap이 있다. 고백하자면 나를 가르친 역사 선생님들도 일본 놈들이라고 불렀다. 나도 그게 습관이 되었고 자연스러웠다. 일본놈, 쪽발이. 그게 아니면 무엇이었던가. 나는 그것이 한 단어로 된 이름인 줄 알았다. 그만큼 강렬했다. 예술이 좋은 것은 세계를 의심하면서도 세계와 교감을 이루려는 노력 때문이다. 서로 연대하여 우리가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싶은 의심을 평화롭게 점령해 가는 작업, 나는 예술의 편에 서고 싶다. 내가 너를 괄시하면 누군가 나를 괄시하도록 문을 열어두는 것임을 내가 믿는 종교는 가르친다. 믿음이 산을 옮긴다고. 사람이 옮겨야 할 산은 그렇게 큰 산이다. 사람으로 옮겨져야 할 산은 그렇게 작은 산이다. 차별이 미움을 낳고 미움이 다툼으로 다툼은 분쟁으로 분쟁이 전쟁을 잉태한다. 수없이 반복해 온 일을 오늘 또 시도하는 우리는 안타깝다. 어리석은 탓일까.

내가 강해서 그렇다. 작은 나가 소중해야 큰 나가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작은 나를 놓치고 만다. 작은. 그러나 소중한 나를 잃으면 내가 아닌 내가 큰소리치고 뻥뻥거리고 삿대질하며 울화통이 치민다. 빈 수레가 되고 만다. 요란하면 병이 나고 멀쩡한 사람도 아프다. 작은 것이 충만할 줄 알아야 가족도 사회도 국가도 세상도 건강하다. 영화는 건강해지고 싶다는 소원을 밖에 걸어놓은 소년 같았다. 아빠의 건강을 빌고, 종교의 건강을 빌고 사람들과 세상의 건강을 기원하는 현수막을 걸어놓고 자전거 페달을 구른다. 참고로 페퍼 역을 맡은 아이는 영화가 처음이었다는데 그 미소를 잊을 길이 없을 것 같다.

강이 : 아빠가 골라준 영화는 재미냐 감동이냐 둘 중에서 감동이 월등히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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