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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Feb 03. 2023

기도 107-1

볕이 들었다

2023, 0203, 금요일



내일은 입춘, 모레는 정월 대보름, 겨울 채비에 바빴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입장이 바뀌었습니다. 겨울이 떠날 차례입니다. 가고 오고 보내고 맞이합니다. 가을이 가는 것만 서러운 줄 알았더니 겨울이 가는 것도 허전한 구석이 있습니다. 올 겨울에는 고드름을 하나도 못 봤고 눈사람도 설경 雪景 속을 거닌 일도 없었습니다. 조심하느라 종종 걷고 서둘러 귀가했습니다. 겨울을 지냈지만 이 겨울에 얻은 것이 없습니다. 한가로울 줄 알아야 하는데 아직도 서툴기만 합니다. 세한도를 품을 수 있는 격조가 아직 마련되지 못한 듯합니다. 이대로 늙고 싶지는 않은데 말입니다.




꿈이었는데, 배경이 다 생략된 꿈으로 한 장면만 남았습니다. 얼굴도 보이지 않고 한쪽으로 가려진 얼굴이었습니다. 부드럽고 매끈한 선이 어깨 위로 내리는 머리카락과 어깨, 그리고 턱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조각배 위였던 것 같지만 아예 아닐 수도 있습니다. 대상은 배경을 떠나서 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기한 것은 그 배경이 영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배경과 얼마만치 조화로웠던 감각이 손끝에, 내 홍채가 빛을 만나는 끄트머리쯤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설명할 수 없을 뿐입니다. 그 순간 꿈인 줄 알았습니다. 꿈속에서 바라는 것들은 내 안의 나, 그의 바람일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찍고 싶다. 그리고 사라졌습니다. 꿈에서 쫓겨난 사람처럼 정신이 들었습니다. 바라는 것이 많은 사람은 어디서든 바라기만 합니다. 그래도 되는 줄 압니다. 내 꿈이었지만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이 다행스러웠습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또 무엇인가를 바랐을 것입니다.




어제 오후에는 볕이 들었습니다.


10분 정도 수업 시간이 남아있는 가운데 다른 아이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봄이 오면 중학생이 될 아이들이니까 그래도 됩니다. 모르는 척 듣고 있으면 온갖 이야기들을 소곤거립니다. 마치 우물가에서 만난 처녀들처럼 재잘재잘 재미있는 표정들입니다. 맞습니다. 연한 초록 물이 오르는 버드나무줄기가 흔들리는 것 같습니다. 그 아이들과 따로 여자 아이 하나가 책을 다 덮습니다. 아직 끝나지는 않았는데? 선생님, 안 되겠어요. 볕이 너무 좋아서 잠시 멍 때려야겠어요.


나는 그런 말이 좋습니다.




사는 일이 긴 것 같아도 짧고 짧은 것 같아도 길었다고 돌아볼 것입니다. 내 삶이 볕을 구경하였기를 바랍니다. 시냇가에 앉아 있었기를 바라고 길에서 해가 졌기를 바랍니다. 아, 또 바라고 말았습니다. 멍 때리지 못하는 것도 병인 듯싶습니다. 물을 보면서, 물멍. 불을 보면서 불멍. 요즘 사람들은 말도 잘 지어냅니다. 나는 어떤 멍이 처방전으로 주어질까 싶습니다. 아이가 보는 쪽을 봤습니다. 아이는 보는데 나는 못 보는 볕이 거기 있었습니다. 아이는 충만한데 나는 밝은 것만 보였습니다. 이제 빨래도 건조기가 말려줍니다. 이 볕이 아까울 때가, 그때가 오면, 그날이 오면 하루종일 놀고 싶어질 것입니다. 하루 더 보고 싶었다고 지금쯤 말하면 소용없을까. 재작년 늦가을에 모닥불을 친구들과 같이 지켜보던 친구를 생각합니다. 지나가는 것들도 빠르고 지나간 것은 더 빨리 멀어집니다. 그 속도를 견디지 못하고 가끔 이렇게 멍하니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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