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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Feb 08. 2023

날마다 봄이 오고 있다

아빠가 쓰는

금요일 저녁 산이가 친구를 데리고 왔다. 좀처럼 없는 일이어서 일부러 현관 앞에 가서 맞이했다. 앳돼 보이는 얼굴에 자세가 반듯했다. 배구를 하느라 중학교 2학년 때 평택으로 전학을 간 친구라고 그런다. 그러니까 환희는 여기 친구들하고 계속 연락하고 지냈고 그중에서도 정현이 - 정현이는 산이하고도 친하다 -하고는 무척 친해서 이번에 놀러 올 계획을 2달 전부터 세웠다는 것이다. 산이에게는 환희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집에 놀러 오기도 했던 산이 친구들은 내가 얼굴을 알고 있는데 환희는 그날 처음 봤다.

3월로 난 쪽문 같은 시간, 가녀린 발목 같은 2월은 종아리로 장딴지로 거듭 올라가는 길목에서 만나는 짬이고 틈이다. 이제 왔는가 싶으면 저만치 그림자가 길어지는 미증유의 허전함이다. 산이는 그 짧은 날을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괜찮을 몸과 마음을 다듬는 데 써야 한다. 2월이 지나면 아이가 바빠진다. 경험해 본 적 없는 바쁜 시간들이 벌써 길 옆에 정렬하고 있을 것이다. 밖으로 나가서 떠들썩하게 어울렸다는 정월 대보름, 나는 바닷가에서 달에게 줄을 놓는다. 그 줄에 편지도 매달아 오래오래 풀어주고 돌아왔다.

산이야,

수학 학원도 새로 바꾸고 낯선 분위기에 적응하기 쉽지 않을 텐데 너는 부지런히 시간을 챙겨 다니더라. 어제는 너도 기분이 좋았던지 그동안 풀었던 문제집을 가져와 동그라미를 자랑하더구나. 좋겠다. 늘 하는 말이지만 수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나는 부럽다.

그것도 고맙고 고마운 것이 한둘이 아닌 거 같아서 편지를 쓴다.

금요일에 환희가 우리 집에 자고 간다고 했을 때는 멀리에서 놀러 온 친구가 잘 곳이 없다는 사정을 듣고 반가웠다. 너희는 어떻게 편하게 잘 잤을까? 토요일 늦게까지 깨우지 않은 것도 피곤할 것 같아서 그랬다. 토요일은 또 어디에서 시간을 보내며 놀았을까. 산이 너는 친구들과 놀던 와중에도 학원 시간에 맞춰 다녀왔다. 곧 고등학생이 되니까 주말에도 공부를 해야 할 처지가 된 것이다. 환희가 그랬다며, 인문계 가려면 이렇게 공부해야 하는 거냐고? 너도 웃었다니까 내가 다 웃긴다.

나는 토요일에 환희가 다른 친구네 집에 가서 머문 줄만 알았다. 네가 그렇게 알려주기도 했고 너도 학원에서 곧장 집으로 돌아왔으니까. 토요일 저녁은 한가로워서 좋잖아. 내가 이번에 고른 영화는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이었다. 너는 학교에서 이미 봤다고 그러면서도 추천하더구나. 영화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나는 거기 나오는 두 소년, 브루노와 슈마엘의 맑은 얼굴을 오래 기억할 것 같다. 둘이서 서로 이름을 물어보고 그런 이름 처음 듣는다던 표정, 최고였다. 너는 그 시간에도 하지 못한 공부를 해야 한다며 네 방과 거실을 오갔다. 공부하다, 엄마하고 아빠가 어떤 장면을 보고 있는지 확인하러 나왔다가 몇 마디 던져주고 후딱 들어가고, 영화가 끝나고 엄마가 먹먹해하고 있으니까 슬슬 장난을 건다. 나는 그것을 모두 편안하게 즐겼다. 소중한 것들이 반짝이는 것 같았다.

정작 일요일이 클라이맥스였더구나. 너희 중학교 친구들 열두 명이 두 달 전부터 그날 만나 하루 실컷 놀기로 했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그날을 위해 환희는 며칠 일찍 익산에 내려온 것이고 제일 친한 정현이네 집에 머물 계획이었던 것이지. 그런데 정현이가 서울에 가야 했고 월요일에나 돌아오니까, 그동안 환희가 머물 데가 없었던 거야. 너는 농구를 했고 그다음에는 또 무엇을 했냐. 이번에도 볼링을 했겠지? 엄마에게서 들었다. 열두 명이 신나게 놀고 다들 집에 돌아갈 때, 스터디 카페에 가서 자겠다는 환희를 네가 불러 세웠다며. 토요일에도 스터디 카페에서 하룻밤 잤다는 이야기를 듣고 괜스레 내가 다 미안한 생각이 들더라. 환희는 그런 분위기더라. 미안한 말 잘 못하는 아이. 나는 그 말이 얼마나 다행스럽게 들리던지, 산이 네가 우리 집에 가서 자자고 그랬다니, 이거야말로 대박 아니냐.

그 감격을 잊고 싶지 않아서 아빠는 편지를 쓴다. 이 편지는 달에게 부치고 오는 길이다. 달이 하늘을 비추는 날에는 네 이야기가 나를 비춰주길 바라면서 부쳤다.

좋은 인연을 만나고 너도 좋은 인연이 되어주라고 쓴다.

아빠가.


날마다 봄이 오고 있다.

날마다 아이가 자라고 있다. 날마다 변하고 있다.

한 사람이 나고 자라는 모습을 지켜본다는 행운을 나는 행복하게 누리고 있다. 행복과 행운이 한 그루에서 자라고 있는 삶이다.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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