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빈방 있나요 / 이운진
방 하나를 갖고 싶어요
주소도 없고
어떤 후일담도 도착하지 않는 곳
벽에는 못 자국이 없고
구석에는 우는 아이가 없고
문 앞에는 딱 한 켤레의 신발만 있는 곳
잘 손질된 폐허 같은
빈방이 있으면 좋겠어요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하루가 가고
젖은 성냥을 그어대는 밤
내 등뼈의 램프에 불을 붙이고 잠든
당신들의 꿈보다 멀리 가고 싶어요
잠긴 집 안의 정원보다
열린 방 한 칸이 어둠이 따뜻해 보이는 곳
바위를 깎아
그 안에 만든 방이라면 더 좋아요
부서진 봄 여름 가을 겨울
나와 나 자신과 단 둘이 살 그런 빈방 있나요.
9월입니다.
사르라니 왔습니다.
첫눈처럼 부끄럽게 내리는 것은 아니지만 온 산에 뜨거웠던 마음들이 9월 첫새벽에 소복이 쌓이고 있습니다.
칡꽃이 먼저 톡, 저만치에다 하나를 떨어뜨리더니 꽃기둥이 흔들거립니다.
나도 모르게 이별이 시작되는 곳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못 본 척 얼른 눈길을 돌리고 이번에는 발소리도 내지 않고 돌아섭니다.
엊그제 나기 시작한 까끌한 머리를 솔솔 거리는 강아지풀 대여섯이 눈치도 없이 깨어 까불고 있습니다.
푸른 동맥이 바닷속 전설 같았던 칡넝쿨은 서로가 서로를, 자기가 자기를 타고 올랐던 일들은 모두 접기로 했습니다.
한여름에도 무섭게 달리던 얼굴이 생각납니다.
그 넓은 땅을 뒤덮고 개망초 같은 것들은 숨도 못 쉬게 하던 넝쿨 줄기를 만져봅니다.
어디선가 솔베이지의 노래라도 들린다면 이 순간 어울릴 듯합니다.
구슬픈 듯, 차갑게 식어가는 남편을 위해 불렀던 그 노래를 움츠러들고 가늘어져 가는 것들을 위해 들려줘야겠습니다.
빽빽하던 달맞이 꽃대는 가벼워졌습니다.
꽃이 다 지면 잎이 마를 겁니다.
당분간 하나 둘 그렇게 비워갈 겁니다.
찰보리빵을 입에 물면서 생각합니다.
'비울까, 비워질까'
아마도 비워질 겁니다.
늙어갈 것이 맞기 때문입니다.
당신에게 적어 주고 싶었던 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적기만 하고 건네지는 않았습니다.
서로에게 아픈 일이 될까 봐 그만두었습니다.
살기만 하고 사랑하지 않은 사람이 그와 같을 것입니다.
'빈집처럼 고요하게'
나에게 남은 말을 덩그렇게 매달아 놓고 살아볼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