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 안도현

시의,

by 강물처럼


연애 / 안도현


연애시절

그때가 좋았는가

들녘에서도 바닷가에서도 버스 안에서도

이 세상에 오직 두 사람만 있던 시절

사시사철 바라보는 곳마다 진달래 붉게 피고

비가 왔다 하면 억수비

눈이 내렸다 하면 폭설

오도 가도 못하고, 가만있지는 더욱 못하고

길거에서 찻집에서 자취방에서

쓸쓸하고 높던 연애

그때가 좋았는가

연애 시절아, 너를 부르다가

나는 등짝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 같다

무릇 연애란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기에

문득문득 사람이 사람을 벗어버리고

아아, 어린 늑대가 되어 마음을 숨기고

여우가 되어 꼬리를 숨기고

바람 부는 곳에서 오랜동안 흑흑 울고 싶은 것이기에

연애 시절아, 그 날은 가도

두 사람은 남아있다

우리가 서로 주고 싶은 것이 많아서



'주고 싶은 것이 많은' 사람은 좋겠다.

밥을 한 술 더 퍼담고, 가시를 고르게 바른 갈치를 하얗게 건네주고, 다음 정거장까지 하나 더 걷고, 바지 뒷주머니가 흘러나온 것이 오히려 정겹게 보이고, 시험에 떨어져 괴롭다는 사람이 기껏 나를 불러내서 소주나 마시고 있어도, 바람이 불면 불어서, 비가 내린다고, 눈을 기다리는 날에도, 발길이 머무는 곳에서는 언제나. 참, 팥빙수를 먹을 때는.


그리고 '가을'에는 늘.


평화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마음이다.

더 없어도 부럽지 않고, 부럽지 않은지도 모르는 잔잔한 수면 위에 비취는 은결이 평화다.

평화는 사랑이겠지. 그렇겠지. 그래야 하지.


그 사람 얼굴은 잊었어도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다는 말이,

당신에게도 해당하는지.

바람 부는 곳에라도 찾아가 흑흑 울고 싶은 '연애시절'이 그대 등을 밀어주는 순간이 있는지.

그렇게 함께 걷는 순간이 불쑥 하룻밤 사이에 자라서 아침이 영 다른 날이 있는지.


아니, 밤새 비가 내린 것을 하나하나 똑똑히 세었던 날이었겠지요.

'주고 싶은 것이 많은' 사람은 좋겠다.

너는 나만 좋아하니까. 너는 하늘 같으니까. 너는 꽃이니까. 너는 말이 예쁜 사람이니까. 너는 연극을 하고, 노래도 하고, 삶을 사랑하니까. 너는 아프니까. 너는 친구 같고, 선생님 같고, 하느님 같으니까. 너는 편지도 잘 쓰니까. 너는 생각나는 사람이니까. 너는 걷는 것도 좋아하니까. 너는 꿈을 꾸니까. 너는 상처가 있으니까. 너는 기도하는 사람이니까. 너는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보니까. 다른 어떤 것보다도 너 닮았잖아.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는 너를 '연애'라고 부르겠지.

연애라는 말을 들으면 '그때'만 떠오르겠지.

나는 자꾸 거두어들이기만 하면 되니까 눈물 같은 것은 필요 없겠지.


그리고 그냥 늘 그렇겠지. 그러하겠지.

암만, 그렇고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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