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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Feb 14. 2023

기도 115-1

희망 없는 곳에

2023, 0214, 화요일



더 이상 어느 집에서도 볼 수 없는 모습이 하나 있습니다. 무릎 꿇고 걸레로 방을 훔치는 것을 아마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훔친다´는 말조차 생소할 것입니다. 저도 아주 오랜만입니다. 마루를 닦고 안방을 닦던 어머니들은 ´그때´라는 시간 속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청소기도 좋아졌습니다. 가끔 설거지 이야기를 하고는 하는데, 설거지도 많이 변했습니다. 우선 말부터 그 변화가 심상치 않습니다. 어른들은 두 편으로 나뉠 것입니다. 설거지 VS 설겆이. 지금은 설거지라고 쓰지만 예전이라는 그때는 설겆이라고 쓰지 못하면 웃음의 대상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영화 제목처럼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렸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때도 맞았으며 지금도 맞다고, 조금은 어리숙하게 들리더라도 그렇게 답하고 싶습니다. 며칠 전에도 구멍이 났습니다. 물론 눈으로 보이지 않는 구멍입니다. 하지만 물이 새어 듭니다. 소인은 큰 일은 맡을 수 없어도 작은 일은 잘할 수 있다고 했는데 설거지는 어떤 일인지 잘 모르실 겁니다. 작고 볼품없는 일입니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 흔히 말하는 돈 안 되는 일입니다. 제 생각이 하나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그 허접스러운 것도 매일, 십 년을 하면 큰 일이 됩니다. 나는 소인이지만 그래서 작은 일이 제격이지만 그 아무것도 아닌 작은 일로 큰 일을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다시 아무 일도 아닌 것으로 돌아갈 줄 아는 그 일이야말로 큰 일이 가진 드넓은 어깨 아닌가 싶습니다.




엄마에게 문자 해라, 고무장갑에 빵구 났다고.


엄마가 문자 왔어, 고무장갑 싱크대 아래에 많이 사다 놓았다고.




항상 일부러 딸아이에게 그 심부름을 시킵니다. 저도 사랑받고 살라고 코치합니다. 장난치듯이 사는 것도 좋지 않겠냐는 말까지는 일러주지 않습니다. 딸은 아빠한테 좀 많이 걸리는 데가 있는 것 같습니다.




희망 없는 곳에 희망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튀르키예 지진 현장에서는 진짜 기적을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너무 어려운 현실에 처했습니다. 그 사람들도 고무장갑 이야기하면서 재미있게 지냈을 것을 생각하면 여기에 있는 나는 미안한 것도 같고 다행인 것도 같고 슬픈 것도 같고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합니다.




우리는 빵빵거리고 끼어들고 칼치기하고 위반하고 과속하고 삿대질하며 멱살 잡고 신고하고 사고가 납니다. 지진 소식을 듣고 구멍 난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하다가 앞으로는 운전하면서 화내지 않기를 다짐합니다. 상대방이 상식적이지 않을 때일수록 나는 상식을 지키기로 다시 마음먹습니다. 그것이 희망 없는 곳에 희망이 되는 일이며 내 안에 희망을 심는 일, 내가 희망으로 열매 맺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참지 못할 때 참는 것이 인내라고 공자님은 가르칩니다. 희망과 인내, 고무장갑은 서로 많이 닮았습니다. 멋진 친구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마르코 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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