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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Feb 15. 2023

기도 116-1

부채처럼 접었다 펼쳤다

2023, 0215, 수요일



화생방 훈련은 가스실에 들어가 방독면을 벗고 견디는 훈련입니다. 군대 다녀온 사람들은 화생방 몇 번에 유격 훈련 몇 번 받았느냐는 질문으로 군대에서 얼마만큼의 강도로 훈련을 받았는지 대충 짐작을 합니다. 훈련의 결정판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운이 좋은 사람은 한 번도 안 받고 용케 잘 피해 갔다고 자랑처럼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짐작하셨겠지만 저는 그런 운은 없습니다. 유격 훈련 같은 경우를 예로 들면, 신병 전입 신고를 하고 간단한 행군 훈련을 한차례 하더니 곧바로 훈련장에 투입되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른 채 한여름의 뙤약볕 아래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녔습니다. 늘 하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좋기만, 나쁘기만 한 것이 아니라고. 유격 훈련을 아예 처음부터 받고 군대 생활을 시작하니 오히려 여유로운 것이 생겼습니다. 훈련은 힘들었지만 그것 때문에 군대를 도망치고 싶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모든 훈련이 나름대로 보람 있었습니다. 지난여름에 가족들과 함께 군 생활을 했던 인제군 원통면 서화리 일대를 돌아봤습니다. 휴전선에도 올라보고 싶었는데 대규모 공사로 입구에서 통제되었습니다. 차로 달려도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리를 걷다니.




우진이 아빠는 저보다 4살 적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아침에 함라산에 다니는 벗이 된 지 근 10년 됐습니다. 300번 시내버스를 운전하며 지냅니다. 우진이 아빠하고 군대 이야기를 하면 그렇게 재미있습니다. 같은 시대에 군 생활을 했나 싶을 정도로 서로의 사연이 하늘과 땅만큼 멉니다. 우진이 아빠는 군대에서도 운전을 했는데, 저는 보기만 했지 타 본 적 없는 버스를 몰았다고 합니다. 훈련소 있을 때 딱 한 번 걸어봤네요, 그러면서 불침번도 거의 서 본 적이 없다며 너스레를 떱니다. 하여튼 내가 아는 신의 아들 중에 한 명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저는 정말이지, 군대가 맞지 않았습니다. 사람들하고 부대끼며 지내는 것이 결코 익숙해지지 않았습니다. 가끔 그때 그 사람들이 꿈에 나와서 괴로울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군대에 가야 한다면, 대신 어느 부대에 갈지 선택할 수 있다면 그때에도 휴전선이 보이는 곳으로 갈 것 같습니다. 학습 효과가 전무한 것인지, 만개한 것인지 그것은 모르겠습니다.




삶을 부채처럼 접었다 펼쳐 보는 기술은 꽤 유용한 듯합니다. 힘이 들 때는 그것을 접어서 짧게 바라보고 즐겁고 행복할 때는 넓게 펼쳐서 오래 누려보는 솜씨는 언제 어디서든 사람을 도울 것입니다. 인생을 축소시키면 한 편의 영화 같으며 그 영화는 군대가 배경이 되는 영화일 수도 있으며 박신양이 나왔던 편지 같은 영화가 될 수도 있고 주윤발이 총 쏘던 홍콩 누아르, 퐁네프의 연인들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가끔 개미들의 일상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하며 살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그게 무엇인지 선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화를 볼 때 많이 집중하는 것도 같습니다. 누군가의 삶을 지켜보면서 내 삶도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무중력을 경험하는 날, 내가 삶을 사는지 삶이 나를 사는지 잠깐 흔들리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때는 걸어도 걷는 것 같지 않고 먹어도 먹는 것 같지 않고 사람들 입 모양만 둥둥 떠서 무성 영화처럼, 흑백 영화처럼 흘러갑니다.




나는 지금을 접을까, 펼칠까, 물끄러미 부채를 바라봅니다. 지금은 어떤 시간일까. 어떤 스토리의 영화가 찍히고 있을까.


´파이란´이란 최민식이 나왔던 영화를 혼자 보고서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그 밤에 창기에게 전화해서 떠들었습니다. 영화를 보는데 참을 수 없는 거야. 외투를 벗어서 얼굴에 감싸고 울었다는 거 아냐. 영화가 슬펐던 걸까, 내가 슬펐던 걸까, 그것도 선명하지 않습니다. 그럴 때, 내 영화가 시작하는 거 같습니다. 그런 날이 있었다는 것을 영화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화를 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지나간 것들과 우리를 위하는 것들이 화면에 가득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영화롭습니다. 나는 영화를* 좋아합니다.





* 영화 - 영화 映畵, 영화 榮華, 중의적으로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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