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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Jul 27. 2023

신경림 ㅡ 눈길

시가 읽는 일기


마른 하늘에 천둥, 번개가 쳤다. 전선이 불안정하다는 것이다. 여름날은 그렇지 않았던가. 놀라는 아이들에게 그 이야기를 해줬어야 했는데 나도 모르게 큰일이 날 것처럼 떠벌렸구나. 나는 은근히 종말론자 쪽으로 기울어 있는지도 모른다. 될수록 그런 말은 삼키는 것이 낫겠다 싶다. 분발을 촉구한다는 투로 교묘하게 불안을 심는 악덕 업자가 바로 나일 수도 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이 고르거나 평화롭지 못하다면 차라리 입에 딱 못을 박아놓을 일이다. 그런데 세상의 이치란 참, 말은 익지 않는다. 속에 담아 놓은 말은 썩는다. 아니면 흐물흐물 녹아서 사라진다. 술처럼 오래되면 진한 맛과 향을 담는 것이 아니라 말은 서툰 모양새로 밖에 나온다. 말은 때와 장소를 놓치면 김이 빠진 것처럼 텁텁해지고 후줄근하고 맥없어진다. 말을 잘하는 것도 복이다. 우연인 듯 치고 나오는 기묘한 발화 發話, 그것은 풀이나 꽃이 피어나는 일처럼 신비로운 발화 發花다. 그것은 주위에 불을 밝히듯 사람을 환하게 만들지 않던가. 옳게 터져 나온 말 한마디는 불을 붙인다. 발화 發火의 순간이다.

그러니 말없이 살겠다거나 아예 말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은 곱게 접어서 나비에게 날려야 한다. 나비가 그것을 타고 선녀처럼 내리는 상상, 그렇게 늙어갈 수는 없을까.

황동규 시인이 김종삼 시인에게 느꼈던 소회를 읽으며 나는 그 거리의 가로등 같았다. 겨울날 한 사람은 집에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고 한 사람은 기다란 외투를 입고 멀찍이 서서 그를 눈으로 배웅하고 있다. 술 한잔 할까,라는 말이 둘 사이에서 표표히 나부끼고 있다. 말을 ·····. 말이 나서다 가만있는다. 대신 내가 전할까 싶다. 나는 가로등, 불빛을 내린다. 둘이 한 시간만 같이 하시지요. 김종삼 시인이 신문지에 돌돌 싸서 들고 가는 저 것이 언어다. 그의 언어는 차갑고 뜨겁고 서럽고 화끈하며 황동규 시인의 말처럼 보헤미안적이다. 정적은 어울리지 않고 눈이라도 내렸으면 하는 마음이 나비에게 전달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러다가 신경림의 눈길을 찾았다. 제목이 쉽게 잊히는 거리에서, 나에게서, 가로등 밑에서 두리번거리며 눈길을 찾았다. 길이 난다. 여름이어도 눈이 날린다. 어제는 눈이 보고 싶었던 7월 26일이었다.

아편을 사러 밤길을 걷는다

진눈깨비 치는 백 리 산길

낮이면 주막 뒷방에 숨어 잠을 자다

지치면 아낙을 불러 육백을 친다

억울하고 어리석게 죽은

빛바랜 주인의 사진 아래서

음탕한 농짓거리로 아낙을 웃기면

바람은 뒷산 나뭇가지에 와 엉겨

굶어 죽은 소년들의 원귀처럼 우는데

이제 남은 것은 힘없는 두 주먹뿐

수제비국 한 사발로 배를 채울 때

아낙은 신세타령을 늘어놓고

우리는 미친놈처럼 자꾸 웃음이 나온다

- 눈길 / 신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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