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톡 메시지가 하나 왔다.
'선생님 영어 2등급 나왔어요!'
얼굴이 그대로 상상이 됐다. 연우는 엷은 막을 하나 갖고 산다. 누구나 가림막 하나쯤 있기 마련인데, 연우의 것은 속이 보이는 얇은 사 絲로 만들어져 좋은 것도 좋지 않은 것도 공존한다. 어쩌면 속이 보인다보다 속을 보인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들어맞을 수도 있다. 처음에 봤던 날, 연우는 속을 보였다. 듣기가 안 돼요. 독해는 18번부터 틀렸다. 듣기 17문제에서 5문제나 맞았던가. 그것은 찍은 거잖아....
저절로 한숨이 나올 것 같은 장면에서 아이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왜, 미안해하니?'
그 표정이 사람을 끌었다. 뒤에서 밀어주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아마 허리를 가능한 뒤로 젖힐 수 있었을 것이다. 어디를 잡고 끌었을까. 인력 引力이 작용했다. 30센티미터쯤 떨어져 있는 나를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끌어당기는 그것은 사람이 내는 힘, 인력 人力이었다. 사람은 사람에게 끌린다.
문을 열고 나가는 연우는 또 한마디 묻는다. 벌써 같은 말이 세 번째 반복된다.
"내신 해주지요?"
옛날 박해 시절에 숨어서 도자기를 굽던 신앙인들, 천주를 믿었던 사람들, 지금은 성인이 된 그들이 책장 사이에서 웃고 있었다. 그것이라도 믿어야 살 것 같은 사람들이 있다.
"해주는 것이 아니라 해야지."
그러고 이제 고등학교 3학년 여름 방학을 맞았다. 연우는 1학기 기말 시험을 마치고 더 이상 공부하러 오지는 않는다. 무엇이든 정이 들면 다른 인연으로 이어진다. 폐차시킨 자동차도 때때로 식구들 사이에 모습을 드러낸다. 공감하고 추억하며 다시 한번 고마워한다. 내가 부르는 인연이라는 말은 사람들의 그것과는 좀 다른 색깔, 다른 모양이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란 말에는 관심이 덜 간다. 그럴 수 있는 것들 -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고 주문한 음식이 늦게 나오거나 다르게 나오는 일, 새 학기 강의실에서 마주친 누구, 또는 강원도 원통, 천도리에 있는 부대에 배치된 일 등등, 그 밖에 수천수만 가지의 그럴 수 있는 것들 - 사이에서 흔들렸다. 세월 따라 바스락 부서지는 소리를 내며 사라지는 그럴 수 있는 것들에게 맡겨놓았던 나를 찾아오느라 얼마나 애썼던가. 인연이라는 말만 알고 지내던 탓이다. 그 말이 나무를 덮고 숲을 덮어 가던 날, 하늘이 보고 싶었다. 하늘은 하늘로도 덮을 수 없으니까. 인연은 거기에 떠있는 섬들, 별빛 같은 것이었다. 지난날의 그림으로도 여전히 살아있는 모습이 인연이었다. 죽어도 있고 없어도 내 안에 여전히 사는 것들, 그것들이 먹고 마시는 반짝임이 인연이었다.
아마 10년이 지나고 내가 더 늙어서 모든 것들을 희미하게 기억하는 데까지, 그때에도 누군가 앞에 서서, '저 그때 연우예요!' 그러면, 그러면 더듬더듬 끄덕일 것이다. 너, 용케도 여기까지 왔구나, 그러면서 웃어줄 것이다.
일기가 길어졌다.
목요일은 또 맑았었다. 곧 비가 내린다고 그러니까 맑은 것을 아껴서 썼다. 더워도 아무 불평 없이, 여름이니까····· 그러고만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