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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Jul 21. 2023

인연

카톡이 울렸다


카톡 메시지가 하나 왔다.

'선생님 영어 2등급 나왔어요!'

얼굴이 그대로 상상이 됐다. 연우는 엷은 막을 하나 갖고 산다. 누구나 가림막 하나쯤 있기 마련인데, 연우의 것은 속이 보이는 얇은 사 絲로 만들어져 좋은 것도 좋지 않은 것도 공존한다. 어쩌면 속이 보인다보다 속을 보인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들어맞을 수도 있다. 처음에 봤던 날, 연우는 속을 보였다. 듣기가 안 돼요. 독해는 18번부터 틀렸다. 듣기 17문제에서 5문제나 맞았던가. 그것은 찍은 거잖아....

저절로 한숨이 나올 것 같은 장면에서 아이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왜, 미안해하니?'

그 표정이 사람을 끌었다. 뒤에서 밀어주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아마 허리를 가능한 뒤로 젖힐 수 있었을 것이다. 어디를 잡고 끌었을까. 인력 引力이 작용했다. 30센티미터쯤 떨어져 있는 나를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끌어당기는 그것은 사람이 내는 힘, 인력 人力이었다. 사람은 사람에게 끌린다.

문을 열고 나가는 연우는 또 한마디 묻는다. 벌써 같은 말이 세 번째 반복된다.

"내신 해주지요?"

옛날 박해 시절에 숨어서 도자기를 굽던 신앙인들, 천주를 믿었던 사람들, 지금은 성인이 된 그들이 책장 사이에서 웃고 있었다. 그것이라도 믿어야 살 것 같은 사람들이 있다.

"해주는 것이 아니라 해야지."

그러고 이제 고등학교 3학년 여름 방학을 맞았다. 연우는 1학기 기말 시험을 마치고 더 이상 공부하러 오지는 않는다. 무엇이든 정이 들면 다른 인연으로 이어진다. 폐차시킨 자동차도 때때로 식구들 사이에 모습을 드러낸다. 공감하고 추억하며 다시 한번 고마워한다. 내가 부르는 인연이라는 말은 사람들의 그것과는 좀 다른 색깔, 다른 모양이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란 말에는 관심이 덜 간다. 그럴 수 있는 것들 -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고 주문한 음식이 늦게 나오거나 다르게 나오는 일, 새 학기 강의실에서 마주친 누구, 또는 강원도 원통, 천도리에 있는 부대에 배치된 일 등등, 그 밖에 수천수만 가지의 그럴 수 있는 것들 - 사이에서 흔들렸다. 세월 따라 바스락 부서지는 소리를 내며 사라지는 그럴 수 있는 것들에게 맡겨놓았던 나를 찾아오느라 얼마나 애썼던가. 인연이라는 말만 알고 지내던 탓이다. 그 말이 나무를 덮고 숲을 덮어 가던 날, 하늘이 보고 싶었다. 하늘은 하늘로도 덮을 수 없으니까. 인연은 거기에 떠있는 섬들, 별빛 같은 것이었다. 지난날의 그림으로도 여전히 살아있는 모습이 인연이었다. 죽어도 있고 없어도 내 안에 여전히 사는 것들, 그것들이 먹고 마시는 반짝임이 인연이었다.

아마 10년이 지나고 내가 더 늙어서 모든 것들을 희미하게 기억하는 데까지, 그때에도 누군가 앞에 서서, '저 그때 연우예요!' 그러면, 그러면 더듬더듬 끄덕일 것이다. 너, 용케도 여기까지 왔구나, 그러면서 웃어줄 것이다.

일기가 길어졌다.

목요일은 또 맑았었다. 곧 비가 내린다고 그러니까 맑은 것을 아껴서 썼다. 더워도 아무 불평 없이, 여름이니까····· 그러고만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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