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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Aug 04. 2023

방학중이다

오래 쓰는 육아일기


"사람들이 두 가지를 묻더라. 그것이 뭔 줄 알아?"

고등학교 1학년들도 중학교 1학년들도 멀뚱 거릴 뿐, 좀체 호기심을 보이지 않는다. 이야기를 길게 끌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커다란 하품을 연거푸 쏟아내느라, 더운데 이 땡볕에 공부하러 오느라, 갖가지 불만이 똬리를 틀고 앉았다. 이 어린 손님들에게 여름은 뱀처럼 교활하구나. 쉬어라, 하지 마라, 거부하라. 여름은 사고 思考에도 사고 事故를 내는구나.

산이와 강이는 책을 열심히 보고 있다. 강이는 방학 전에 주문을 부탁한 책 다섯 권을 매일 읽고 있다. 자기 방에 앉아서 책을 읽는 폼이 꽤 숙달된 조교의 시범을 보는 듯하다. 자세가 말해주고 있다. 강이는 지금 한창 흥미 있다고. 다만 걱정 하나는 수학 학원을 다니지 않고 있는데 어떻게 그 부분이 문제가 되지 않도록 토닥거리고 있는지. 월요일부터는 수학 학원에도 나갈 생각이라고 그런다. 강이는 둘레길에서도 씩씩했다. 숨이 가빠질 때는 엄마를 부르고 가방을 내게 맡겼다. 집에 돌아와서 가장 회복이 빨랐던 사람도 강이였다. 엄마는 몸살이 나서 움직일 때마다 에구구 그러는데 말이다.

인터넷 강의를 찾아서 듣더니 점심 챙겨 먹고 학원에 간다며 나서는 산이는 밤 12에 들어온다. 엊그제 산이는 혼났다. 더워서 자다 깼는데 아직 집에 들어오지 않는 산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하고 게임 한 판 하고 있다는 말에 화가 났다. 12시 52분. 아이가 정신이 없구나 싶어서 내 정신도 혼란스러웠다. 내막을 듣고 보니 이해가 갔다. 그래도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더 잘할 수 있는 쪽으로 아이가 뛰어가기를 바라는 나 자신이 안타까웠다. 산이는 걷기 싫은 길을 참고 걸어주는 아들인데 말이다.

"애들이 따라와요?"

둘레길을 걷다가 받는 전화, 건너편 상대방은 지금 둘레길이란 이야기를 들으면 누구나 묻는다. 누구랑 걸어요? 애들이 걸어요? 질문이 늘어나고 늘어날수록 목소리도 커진다. 꼭 그만큼씩 내 목소리는 점잖아진다.

심지어 우연히 길에서 만난 어떤 가족도 내게 물었다.

"애들 데려 오기 힘들죠?"

그때마다 가볍게 웃으면서 넘긴다. 아마 내 대답을 그쪽으로 알아들었을 것이다. 자기들에 가까운 쪽.

우리는 억지스럽게 길을 걷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걷자고 나선다. 물론 그것은 '당신 생각'이겠지? 그런 말에 준비가 되어 있다. 내 생각, 내 의지, 내 계획이 대부분이다. 나는 절실하게 여기고 고맙게 여긴다. 그래서 겨우 길을 걷는 일이지만 최선을 다한다. 최선을 다해서 시간을 만들고 이동하고 걷고 먹고 쉰다. 얼굴들을 살피고 호흡을 듣고 걸음을 감각한다. 거리를 항상 머릿속에 그리면서 긴장하고 웃고 힘들어하면서 좋다고 말한다. 행복이란 거대한 추상의 표정을 그렇게 들여다본다. 행복을 보게 되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먼저 기다리고 먼저 마중하고 늦게까지 남고 늦게까지 여운을 간직할 것이다. 우리는 걸을 때 행복하기로 했다.

"나는 그렇게 살 줄 몰랐네요."

두 번째는 질문이 아니라 고백으로 묻는다. 끝을 올리는 의문이 아니어도 내 대답을 요구하는 문장이다. 저것은 마음이다. 우리 좋은 것은 같이 나누자는 말이다. 나는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 그것은 내가 못난 사람인 줄 알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살 줄 몰랐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30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여전히 아빠는 어렵다. 그 이름 앞에 어떤 말들로 장식해야 좋을지 망설이다가 차라리 거기를 돌아가고 만다. 돌아가다가 미안해서 그리고 슬픈 것도 있어서 '내 잘못'이겠거니 얼버무린다. 예순 살이 되어도 일흔이 넘어도 얼버무릴 것이다. 순간순간 삐쭉 솟아나는 저것을 어떻게 다스릴까, 내 처방은 효과가 있을까. 나도 묻고 답한다. 내 대답이 영 형편없는 줄 잘 아는 탓에 다시 땀을 닦고 일어선다. 다 걷고 나면, 다 걸을 리 없는 내가 하는 약속이 허랑하더라도 그런 사람이 하나 있었다며 웃었으면 한다. 내가 사는 일은 일이 아니었기를 바라고 우리가 걸었던 날들은 꿈만 같아서 없었던 날들 아니었던가 하면 좋을 것이다. 다만 행복 幸福이란다.

산이와 강이는 지금 여름 방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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