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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Aug 02. 2023

여름날 서정

중간쯤 왔다

연일 고온이다. 자주 비가 내린 탓에 체면을 구긴 7월이 그대로 사그라들지 않고 어딘가에 숨어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억울했던가, 분했던가. 마지막 남은 열기라도 끝까지 태우고 싶었을 것이다. 8월에 힘을 보태 위용을 과시하는 너, 7월이여. 숨을 거두지 마라. 불같이 타올라, 작열하라.

지리산 둘레길 21코스, 끝이 어딘지 찾아본 적이 없다. 그 첫 번째 코스를 걸었던 늦겨울이면서 이른 봄이었던 계절에서 우리는 얼마만큼 지나왔을까. 엊그제 수은주가 35도를 넘었다는 날에 우리는 둘레길 열 번째 코스를 걸었다. 하루, 길에서 보낸 이야기를 다 적었는데도 따로 이렇게 작은 표지를 세워 기념하고픈 마음이 든다. 우리는 절반을 지나온 셈이다. 덕산에서 위태, 9코스 9.7km를 남겨뒀지만 이쯤에서 그동안 수고했다는 말과 앞으로도 잘해보자는 격려와 바람을 담아 보자.

하동호수를 오른편에 두고 걸으면서 너희는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거기에는 여러 마을이 물에 잠겼다고 하더라. 가볼 수는 없지만 옛날 모습 그대로 거기 남은 고향이라니. 사람 사는 일도 그럴 것 같다. 산길을 힘들게 다 내려와서 더 걷고 싶지 않았을 텐데 묵묵히 함께 걸어줘서 고마웠다. 아빠도 호수를 오래 바라볼 여유가 없더라. 여름 한낮 태양볕에 호수가 이글거렸다. 이제는 아이스크림으로 달랠 수도 없을 만큼 커버린 너희들이 씩씩하지 않으면 아빠도 엄마도 오늘처럼 행복하게 걷지 못할 것이야.

긴 사연을 담은 편지를 보내는 마음으로 우리가 다녀온 위태 마을, 궁항마을 그리고 높다란 고개를 세 개나 넘으면서 흘렸던 정성스러운 이야기를 여러 사람들에게 들려줬다. 엄마도 그러자는데 우리 둘레길 여정을 다 마치면 한 권의 책을 엮어 보는 것이 어떨까. 오래 두고 볼 수 있으면 좋겠구나.

막내 이모가 이렇게 답장을 보내왔다.

'부러우면서도 안 부러운···· 그쯤'

얼마나 좋은 말일까 싶다. 나는 흐뭇해서 곧장 이렇게 썼다.

'그 지점이 선 善'

길을 걷는 것이 자랑도 아니고 자랑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쉬운 것이고 평범한 것,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숨 쉬는 것처럼 밥 먹는 것처럼 잠자는 일처럼 다정하고 흔하고 예쁜 일이다. 다투지 않고 서두르지 않고 해를 끼치지 않는 일이다. 그러려고 일부러 해보는 일이다. 노력하는 일이며 즐기는 일이고 살아가는 일이다. 그러니 선 善해야 한다. 절반쯤 왔다는 이정표는 이렇게 적어놓자. 바람이 햇볕과 사이좋게 지내요.

다시 위태 마을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 우리 차를 찾아간다. 우리를 태워준 택시 기사님이 그러셨잖아. 다음 삼화실로 올 때는 산청으로 오지 않고 구례 쪽에서 들어오면 된다고. 그 말이 절반을 지났다는 말이었다는 것을 너희는 알았을까.

그래서 끄덕였다. 조그맣게 시작했던 발걸음 하나하나가 둥둥 공중에 떠올랐다. 내 공상은 이런 장면이었구나. 우리는 그중에 가장 큰 걸음에 올라타자. 열기구처럼 화끈하게 떠올라 저 아래 길들을 내려보자. 얼마나 멋진 선들이냐. 얼마나 구비 져서 흐르는 시간이냐. 남은 날은 너희가 더 자라겠구나. 자라서 자라서 나무도 되어 보고 물처럼 흘러도 보고 새끼 입에 먹을 것을 넣어주는 밀화부리도 되어 봐라. 우리는 모두 길에서 자란다.

"강이야, 너 이렇게 물을 두 손으로 담는 것을 뭐라고 하는 줄 알아?"

"물을 퍼담다?"

잊고 있었던 말이 떠오르는 일상, 그 순간들이 나를 말해줄 것이다. 돌 틈 사이로 흐르는 물을 받아 얼굴을 식히는 아이가 보기 좋아서 사진을 찍다 말았다. 빛나는 것들은 눈으로, 눈에 담고 싶다.

"이거 물을 앙구었다고 그런다. 두 손으로 물을 앙구어 얼굴을 씻었다. 그래."

기특하다. 학교 들어가기 전에 전미동 할머니 집 마당에 있던 우물에서 세수할 적마다 들었던 말이, 포로롱 날아올랐다.

말이 새가 되고 새가 된 말이 나를 물고 간다. 다 둘레길에서 생겨난 이야기다. 모두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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