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물처럼 Aug 08. 2023

新 밥상머리 33

무섭지 않아


여름 방학을 하면서 강이는 수학 학원을 그만뒀다. 한 가지 결정을 하는 데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중학교 1학년 아이에게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일은 굉장한 솜씨가 필요하다. 전체적으로도 상황을 이해시키면서 개별적인 문제들을 하나씩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아이의 감정과 사고까지 골고루 살펴 가며 설명의 속도와 방향을 오로지 상대방에 맞게 조정할 줄 알아야 한다. 나는 그 부분이 서툴다. 가족이기 때문에 더 서툰 지점이 거기다. 차분하고 객관적인 관찰자적 시점을 견지하지 못하고 서둘러 내 쪽으로, 내가 아는 합리적 공간으로 끌어당기려는 힘이 작용한다. 아이가 주춤하면 할수록 그 강도가 세지는 것을 느낀다. 그러면서도 가속이 붙는 것이야말로 못 말리는 현실이다. 기다리기, 그것이 좀처럼 안 되는 것이다. 뜨거운 심장, 차가운 이성 - 더 이상 이런 슬로건에 현혹되는 사람은 없다 - 이란 말이 무색하다. 더워서 그런가. 앉아있을수록 뜨거워지는 것은 엉덩이다. let it be, 그 지혜로운 말이 하필 엉덩이에 찰싹 엉겨서 들썩거린다.

강이하고 둘이서 점심을 차려 먹었다. 둘이 먹는 밥이 가장 예민하게 굴 때가 있다. 마땅히 할 말이 없는 두 사람이 밥 먹는 장면은 생각만으로도 사람을 숨 막히게 한다. 둘이 밥 먹을 때는 조심하든지 잘해야 한다.

더구나 우리는 수학 학원을 두고 1차전을 치른 분쟁 당사자들이라 가능한 지금은 상대를 압박하거나 도발해서는 안 된다. 나이 많은 내가 유리할까, 불리할까. 나이 어린 강이가 빠르게 치고 빠지지 않을까?

"강이야,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지?"

아주 태연하게 시작한다. 가볍고 아무렇지 않을수록 공격은 효과적이다. 더구나 상대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면 아주 잘 들어맞은 공격이다.

바로 공격 아닌 공격으로 간다.

"나이가 많으면 뭐가 좋을까?"

예상보다 빠르게 강이 입에서도 말이 나온다.

"무섭지 않은 거?"

강이는 사교성과 이타성이 높은 수준이지만 불안감이나 우울감도 그에 못지않았다. 지난 학기에 했던 성격검사 결과지를 살피다가 내가 몰랐던 사실들을 마주했다. 나는 강이가 자주적이며 주체적이라고 여겼다. 그런 만큼 자존감이 높을 것이고 따라서 긍정적이면 긍정적이었지 결코 부정적 요소가 높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다 알다시피, 자존감이 낮은 학생들은 타인에게 거절이나 배척을 당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민감하게 생각한다고 결과지에도 쓰여있다. 아이가 학교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어려움을 나도 아내를 통해 들어서 익히 알고 있다. 나와 상대의 1 대 1 문제가 아니라, 내가 속해 있는 집단 내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휘말릴 수밖에 없는 구조에 대해 강이는 고민이 많다. 예를 들어, 한 반에 열서너 명 있는 여자아이들이 서너 개의 그룹으로 친하게 지낸다. 그룹 간에는 보이지 않는 경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같이 밥을 먹으러 가고, 같이 화장실 가는 그런 동료 의식이 발휘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같은 그룹 내에 있는 친구끼리 반목이 생기면 문제가 커지는 것이다. 그 그룹은 와해되거나 아슬아슬하게 유지되어 가는 것이다. 그런 분위기를 강이는 힘들어하는 편이다. 따로따로 친구를 만나야 하는 입장이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결국 엄마에게 하소연하기를, 친구는 많은데 마음이 가는 친구가 없다는 것이다.

"무섭지 않은 거?"

강이의 공격은 오히려 힘이 없어서 나를 멈추게 했다. 그 공격은 공격이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주저하게 했다. 너는 무서운 거구나. 너는 무섭다고 말할 줄 아는구나.

나도 자세를 바꿔서 새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이가 들어도 무서운 것은 있어, 그런데 옛날하고 좀 다른 것이 있어."

식탁 위에 있는 반찬을 한쪽으로 치우고 젓가락을 오른손에 들고 나이가 무엇인지 보여주고자 했다. 나이는 이렇게 생겼더라고, 흠흠, 목을 가다듬었다.

"너 높은 데 올라가면 시야가 넓어진다는 거 알지? 높은 데 올라가면 멀리 보이잖아."

"내가 아래에 있으면 여기에서 여기만 보이거든, 봐, 여기 이렇게"

오른손으로는 젓가락을 세워놓고 왼손으로는 한 칸씩 높아지는 시늉을 하며 아래로 사선을 그어댔다. 식탁을 세상처럼 꾸몄다.

"나이가 드니까 멀리 보이고 잘 보이는 것들이 생기더라고, 물론 여기에서도 잘 안 보이는 것들은 많아. 하지만 적어도 옛날에 내가 포기했던 것들, 무서워했던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그것을 알 수 있다는 거야."

강이야, 네가 좋아하는 거, 잘하는 거 하면 돼.

지금은 수학이 어렵고 무서울 수도 있어, 그런데 그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찾아올 수도 있다는 거야.

내가 내일 누구를 만날지 모르는 것처럼 어떤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아무도 모르거든.

끄트머리는 대화가 아니라 독백이었다. 나한테 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강이가 어른이 되어서 찾아볼 말이었으면 했다. 입도 아무것도 덜썩이지 않았다. 다만 눈빛으로라도 그 말은 새었을 것이다. 먼 데 빛이 비치던 풍경은 늘 평화롭지 않던가. 평화가 희망이니까.

강이는 어제 오후 엄마하고 새로운 수학 학원에 다녀왔다. 앞머리도 자르고 들어왔다. 아이스크림도 사 갖고 와서는 나한테 하나 쥐여준다. 식기 전에 먹으라나.

작가의 이전글 시절 유감 遺憾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